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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Rrrrrr


"마사오미, 전화야."

"아, 잠깐만- 누군데?"

"-이자야씨."


마사오미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렇게 싫은 표정 하고만 있지 말고 빨리 받아. 아아, 일거린가? 그거 말곤 이자야씨가 전화할 일은 없지 않을까? 젠장, 목소리 듣기 싫은데- 마사오미의 투정아닌 투정에 사키가 쿡쿡 웃으며 핸드폰을 마사오미 앞에 내밀었다. 얼른 받아야지, 우리 돈줄이잖아.


마사오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키에게 가늘게 떨며 벨소리를 토해내는 핸드폰을 건내받았다. 마사오미는 발신인에 찍힌 [이자야]라는 이름을 보며 3초간 쉼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키다 마사오미군, 사키랑은 잘 지내는 것 같더라?"

"안부만 물을거면 빨리 끊어주세요. 당신 목소리 듣는 거, 힘드니까."

"이야이야, 그런 말 말아줄래? 나도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게 아니니까. 정말이지, 미카도군 때문만 아니었음 나도 연락 안 했어."


이자야의 말에 순간 마사오미의 몸이 흠칫 굳었다. 마사오미? 왜 그래? 이자야씨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래? 사키가 의아한듯 물어왔지만, 마사오미는 이자야의 입에서 거론된 한 이름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 듣지 못했다.


"……미카도…라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젠장. 나도 네놈한테 이 용건으로 전화할 줄은 몰랐다고.


"뭐예요? 미카도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데 당신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건데!!!"

"워워- 진정하시지? 내가 손 댄거 아니거든?"

"-이자야씨가 예전부터 미카도 녀석에게 신경쓰고 있단 건 아니까, 그런 말 해도 못 믿습니다만?"

"너무하네─. 이번 일은 정말로 내 예상 밖이야. 나도 지금 엄청 놀랐거든?"

"그, 러, 니, 까! 그 미카도가 어떻게 된거냐고 묻고 있잖아요, 지금!"


대답을 피하는 이자야의 화술에 겨우 억눌렀던 짜증이 다시 폭발했다. 핸드폰에 소리를 꽥 지르자, 질렸다는듯 혀차는 소리가 작게 넘어왔다. 여친이랑 같이 도망간 주제에 어디에 대고 큰소리야, 큰소리는? 그게 미카도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 말에, 이자야답지 않게 작은 한숨과 함께 수화기로 넘어온 대답.


"만약 상관이 있다면 어쩔 건데?"

"──네?"


제멋대로 떠들었던 말에, 예상외의 답이 돌아온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사오미가 무심코 목소리 톤을 올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단 걸, 이 반응으로 알아챈 이자야가 다시 한 번 전달한다.


"네가 사라진 거랑 미카도군의 문제. 상관이 있단 말이야. 그것도 엄청."



-



"……기억, 상실? 그 말을 지금 제가 믿으라고요?"

"안 믿을거라면 이만 끊는다. 나도 지금 바쁘니까."

"잠깐만요! ……정말입니까."


전화를 끊을듯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단 일시정지를 걸고, 잠깐의 침묵이 지난 후에, 마사오미는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확인절차를 밟았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걸로 거짓말은 안 해."

"그 당신이 HELP 요청을 할 정도니까, 믿겠습니다."

"어련하시겠어."


마사오미의 태도에 콧방귀를 흥, 하고 뀐 이자야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이케부쿠로에 와서 미카도군을 만나도록 해."

"제가 만난다고 해서 기억이 돌아오리란 보장은 있어요?"

"보장? 그런 건 없지."

"그런데 왜-"

"이케부쿠로에서 기억을 잃은 미카도군이 알고 있는 사람은 너 정도야. 알겠어? 이 사실을 미카도군의 부모님께 알리고 싶어? 네가 안 된다면 사이타마로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뭐, 기억이 안 돌아와도 보낼 생각이지만."


이자야의 말에 마사오미가 조금 놀란투로 되물었다. 이자야씨가 미카도를 돌려보내요? 그 말에 이자야가 빈정상한듯 대답해왔다. 마음같아선 미카도군을 내가 돌봐주고 싶은데…, 그래도 난 기억이 있는 미카도군이 더 좋거든.


"이자야씨가 그런 말을 하다니, 세상 종말이 곧 다가오려나봐요."

"닥쳐줄래, 키다 마사오미군?"

"오글거리니까 풀네임으로 부르는 거 그만둬주시죠."

"어떻게 부르든 내 맘이야. 그래서 결정은?"



"──가겠습니다. 미카도한테."






*





마사오미의 대답을 듣고는 빨리 오라는 말을 간단히 하고 그대로 끊었다. 뭐, 내가 끊지 않았더라도 키다 마사오미의 성격에 내가 선수치지 않았더라면 먼저 끊고도 남았겠지만.


미카도군이 기억을 잃은 것에 '키다 마사오미'가 관계가 있는 이유는 결국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눈치 챘을까, 못챘을까? 그렇게 동요할 거면서 버리고 도망가다니. 바보같은 장군이란 말이야."


하하하하 웃으며 이자야는 마스코트가 된 퍼코트를 걸쳐입고 집을 나섰다. 등뒤로 '미친 놈.'하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나미에의 시선이 잠깐 달라붙었지만. 이자야는 언제나와 같은 일이나 오늘 저녁은 미카도군이랑 먹고 올테니 일 끝나면 일찍 퇴근해도 좋아, 라고 등뒤로 작게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기뻐하고 있을 게 눈에 선하다. 세이지를 더 볼 수 있어! 라면서.


이자야는 지하철에 타고 이케부쿠로로 향하면서 다시금 미카도를 떠올렸고, 기억상실이란 병명과 현재 미카도의 상태를 떠올렸고, 키다 마사오미와의 통화내용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비겁하고도 멍청한 남자야.


──그렇게 곁을 비우는 사이에 누가 어떻게 손을 쓸지, 하나도 생각해보지 못할만큼 바보지.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주제에 겁쟁이, 거기에 바보라서 결국 일을 망쳤어. 그러면서도 결국 이렇게 돌아올거면서.


기대해도 좋아. 이제부턴 후회 가득한 쇼타임의 시작이라구.



-



"이자야씨, 오셨어요?"

"응, 와버렸어! 라고나 할까. 자 여기."


이자야가 들고왔던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든 미카도는 그 안을 들여다보곤 미안하단 표정이 역력한 채로 고맙단 인사를 전했다.


"이야,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치만 오실 때마다 항상 이렇게 먹거리를 사오시잖아요…."


게다가 죄다 가격들이 절대 싼게 아니고……. 우물우물 미카도가 말을 이었다. 이자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미카도군이랑 더 친해지고 싶으니까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노력하는거야."

"이자야씨같은 분이 왜 저같은 애랑 친해지려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구요."

"응? 그야- 내가- 미카도군을- 좋아하니까!"

"그런 장난은 그만 두세욧!"

"어? 장난 아닌데?"

"이자야씨……게이에요?"

"아니?"

"근데 전 남자라구요."

"아는데?"

"그리고 이자야씨도, 남, 자, 라구요!"

"그게 왜?"


모르는 척 하는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 태도 자체에는 어떻게 딴지를 걸만한 부분이 하나도 안 보인다.


"이자야씨는 게이가 아닌데 절 좋아한다고요?"

"나는 말이야, 남녀노소를 통 틀어서 [인간]을 좋아해. 그리고 미카도군은 그 인간들 중에서 제일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야. 단지,"


"제가 우연히 남자였을 뿐이다─라고 말하시게요?"


미카도가 이자야의 말허리를 자르며 뒷말을 이었다. 와우. 역시 미카도군! 감탄하며 더 반했어!를 연발하는 이자야의 모습에 미카도는 작게 한숨지었다.


도대체 미래의 나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랑 안면을 튼거지? 어쩌다 이런 사람한테 좋아해를 연호당하게 된거야? 이 사람은 이렇게 멀쩡하게 생겨서, 어지간한 미인도 얼굴로 다 녹여버릴 수 있을 외모인 주제에 왜 나같이 평범한 애한테 이러는거야? 장난인 것 같은데 계속 이러는 걸 보면 어쩌면 진심일지도 모른다 쳐. 그런데 좋아한다고 나한테 고백해대면서 그러면서 게이가 아니라니, 그거이상하지 않아?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을 사랑한단 말은 도대체 뭐야? 이사람 변태? 변태야? 이런 예쁜 얼굴로 변태인거냐고???


커지는 의문 속에 미카도가 빠져들 무렵, 미카도의 이런 상태를 눈치챈 이자야가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있지 미카도군, 키다 마사오미는 기억하고 있댔지?"

"네? 아, 네. 잊는다거나 할리 없잖아요."


미카도의 대답에 뭔가 불만스러운듯 흐응 하는 콧소릴 내더니 별안간 싱긋 웃었다.


"만나보지 않을래? 키다 마사오미."



-



"마사오미한테 제 이야기를 다 해버렸다니……너무 독단적이에요."

"으음 그치만, 이렇게 안 하면 미카도군은 어차피 키다에게 전화도 못했을 것 같고?"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자야가 작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해왔다. 확실히, 마사오미에게 전화도 메일도 못하고 있었던 내가 무슨 수로 마사오미와 만난단 말인가. 안 그래도 집에서도 거의 못나가고 있는데.



-



"키다군이야?"

"요, 미카도! 만나자마자 의문형이냐! 자, 선택지는 세개가 있다, 골라보라구! 1번 키다 마사오미, 2번 키다 마사오미, 3번 키다 마사오미!"

"키다군, 키다군이네! 오랜만이야! 엄청 자랐구나! 근데 머리가 까매졌네?"


오버액션을 취하며 미카도에게 이케부쿠로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개그를 어필해봤지만, 돌아오는 반응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말로 기억상실이란 말야? 미카도 뒤에 서있는 이자야에게 그런 시선을 주어도 자긴 모르겠다는 어깨으쓱만 돌아왔다. 젠장할이군, 정말로.


"아아, 한창 노랑머리로 다니다 질려서 이번엔 정반대로 검은색으로 염색해봤지!"

"노랑? 흐음- 키다군한테는 노랑이 더 어울릴텐데. 검은색도 나쁘진 않지만, 키다군, 조금 가벼운 느낌이니까 말야. 검은색은 너무 무거운 것 같아."

"너무 사정없이 찌르는 거 아니냐 너!? 내 순수한 마음을 얼마나 브로큰하트할 셈이냣!"

"그치만 이사가기 전의 키다군은 좀더 멋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 더 무식발랄해진듯한-"

"우옷, 느닷없이 독설로 크리티컬 히트냐!? 무식발랄이라니 뭐얏, 이래뵈도 이몸의 국어성적은 '수'였다고!"

"─거짓말. 그런 뻥을 누가 믿는다고 그래. 허세도 적당히 해. 지나친 허세는 꼴보기 사나워."

"미카도 네 이놈! 누가 이런걸로 허세를 부린단 게냣! 정말이라고!"


기억이 정말로 있었다면 딴지를 거는 곳도 이유도 이것과는 달라졌을 터였다. 내심 "다 거짓말이야!" 라면서 방긋 웃어주길 바라고 미카도를 떠봤기에, 자신을 보고 신나있는 미카도에게 연신 웃어주면서도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기억을 잃어버린 거냐, 너…….



-



키다 마사오미와 열심히 떠드는 미카도의 모습이 의외라 이자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이 미카도는 아직 애. 키다 마사오미가 이사를 가고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무렵의 아이다. 그 때는 키다 마사오미도 굉장히 어렸을 터. 그 어렸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할 미카도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각오되었을 키다 마사오미의 변화, 라는 과정을 겪지 못하고 키다 마사오미와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없이 떠드는 것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뭔가 이상해.


이게 정말로───단순한 기억상실일 뿐일까?


"미카도 선배, 지금 뭐하는 거예요?"

"응? 보다시피 선물 고르고 있잖아."

"누구 줄 선물인건지 궁금해서요. 앙리 선배 생일은 아닌데, 아무리봐도 이건 또래 여자애들에게 줄만한 선물을 파는 곳이라…"


미카도가 여전히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하며 선물을 고르고 있는 채로 하하 웃었다. 아오바군, 내가 그렇게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거야? 너무하네. 잊었어? 아오바군이 소개해줬었잖아, 오리하라 쌍둥이들.


그 말에 아하, 하고 궁금했던 것을 해결해 펴졌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근데 선배가 왜 걔네들 선물을 챙기는데요? 생일이래요? 저한텐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었는데.


아오바의 말에 미카도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조금 사정이 있어서…"


.


.


오리하라 쌍둥이 자매와 미카도를 서로 소개시킨 뒤, 잠깐 전화를 쓸 일이 생겼다며 아오바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이 무거워, 미카도가 애써 말을 꺼냈다.


"너네가 이자야씨 동생들이었구나?"

"선배가 그 '류가미네 미카도'예요?"

"그 류가미네 미카도, 라니?"

"臨(이자야 오빠가)…好(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맞아, 이자 오빠가 맨날 미카도 선배 이야기를 지껄인다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시끄럽게 군다며 나미에 언니가 짜증냈던 적이 있었거든요. 뭐, 지나가면서 했던 말이긴 한데, 이자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궁금해지잖아요?"

"조, 좋아한다니?"

"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두 사람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되물어오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자신이 오리하라 이자야에게 고백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고, 솔직히 이자야에게 호감도 있었기에 OK했었고, 일단은 사귀고야 있지만……남자와 남자라는 점 때문에 미카도는 이자야의 두 동생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말로 볼 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숨기는 것도 이상할 것 같긴 한데……. 이자야씨,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요…보통 남자가 남자랑 사귀는 걸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진 않는다고요….


미카도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굳어있자, 쿠루리와 마이루가 눈으로 대화를 나누더니 미카도의 손을 한 손씩 붙잡았다.


"이자 오빠가 좀 많이 짜증나는 사람이지만, 잘 부탁드려요!"

"嫌(다들 싫어하는 사람이라)…帝(미카도 선배라도)…好(좋아해주셔서)…幸(다행이에요)…"


이미 연인 사이라는 걸 확정짓고, 그것을 전제로 오빠의 연인에게 오빠를 잘 부탁한단 말을 전하는 두 사람에게 미카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쩔쩔 맸다. 이 두 사람은 이자야씨와 내가 사귄다는 거에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는거야? 쿠루리가 가벼운 패닉상태에 빠진 미카도에게 회복한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쏟아부었다.


"그래서요, 선배, 번호라도 알려주시지 않을래요? 메일주소도 괜찮아요. 이자 오빠의 연인이잖아요? 혹시 이자 오빠에 대해 궁금한게 있으면 저희들이 아는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선배같은 사람이 아니면 이자 오빠는 평생 사랑받지도 못할 게 뻔하니까요!"

"助(도와주고 싶어요)"


두 사람의 말에, 솔직히 미카도는 솔깃했다. 이자야가 해주는 것들은 모두 철저하게 미카도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기에, 미카도도 이자야의 취향에 맞추어 선물이라도 하나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야는 미카도에 대한 것은 얼마든지 알고 있지만, 이자야가 이야기한 매우 소소한 것들을 제외하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미카도에게 오리하라 자매는 정보원이 되어 주겠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에 흥미가 없다면 그것이 거짓말이겠지만…….


미카도의 그런 흔들림을 눈치챈 쿠루리와 마이루의 막판 굳히기!


"이자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 궁금하지 않아요?"

"外(전골은 제외하고요)"


두 사람의 말에 미카도는 결국 소중한 정보원들을 얻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카도 역시 이자야가 좋아할만한 뭔가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잘 부탁할게."

"그럼 메일주소 알려주세요!"

"핸드폰 줘봐."

"충전기에 꽂아놓고 깜빡하고 안 가져 왔어요. 적을 거 없으세요?"

"기다려봐, 볼펜이 어디 있을텐데……."


.


.


"그래서 두 사람과 문자 친구가 돼서, 그동안 도움 받은 거에 대해 답례를 하려는 거라고요?"

"응, 그렇게 되네."


다시 핀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선물을 고르는 미카도의 뒤에 서서 아오바는 쌍둥이를 떠올리며 '그 두 사람이 오빠라는 사람의 연애사에 신결쓸 정도로 섬세한 사람들이었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뭔가 찝찝한데, 그게 뭔지는 콕 집어 말하지 못하겠다. 분명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뭘까?


-Rrrrr


미카도의 핸드폰이 작게 울었다. 메일 도착음. 미카도가 마침 맘에 들었는지 핀을 한 손에 들고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확인했다.


[미카도군, 오늘 같이 전골 먹으러 안 올래?]


미카도가 메일의 내용을 보고 피식 웃는 걸 본 아오바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누구 메일인데 그래요?


아오바의 물음에 미카도는 순순히 답했다.


"…이자야씨."

"아무리 그래도 애인있는 티를 너무 내시네요. 옆에 있는 솔로 후배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자기가 물어봤으면서. 게다가 아오바군이야, 학기 초에 받았던 고백을 모두 거절해서 솔로인거잖아."

"그치만 좋아하지도 않는,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고백한다고 해서 대뜸 수락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아는 것도 없는데 이 사람이랑 사귀어도 좋을지 어떻게 알아요. 당연한 행동이라고요."

"다른 애들은 잘만 사귀던데 말이야."


아오바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애인 운운하며 이야기를 꺼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아오바는, 미카도와 이자야가 사귄다는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계기는 단순했다. 데이트라며 신난 이자야에게 끌려 같이 다니고 있을 때, 아오바와 딱 마주쳤으니까. 그것도, 하필이면……이자야씨에게 키스당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다음날, 고민하던 미카도는 이미 봐버렸으니, 차라리 알려주는게 나을 것이란 판단 하에, 아오바에게는 사실대로 설명했고, 아오바는 상대가 오리하라 이자야라는 것에 놀랐던 것을 빼면 미카도가 남자와 사귄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종, 방금처럼 커플과 솔로의 관계로 농담을 던지는 일은 종종 있어도.


아오바는 잔뜩 심통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배도 그런 속물적인 인간이었단 말이에요? 실망이에요!"


아오바가 아무리 심통을 부려도, 원판이 귀여운 얼굴이라 어쩔 수 없이 표정의 전달력이 뚝 떨어졌다. 아오바가 삐졌어요!를 써붙이고 흥, 하고 콧방귀 뀌는 것을 본 미카도가 귀엽다는듯 아오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게 실망하지 말아줘. 난 그런 고백도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으니까 부러워서 그랬어."


아오바가 미카도의 쓰다듬에 표정을 풀었다. 그런 말, 그렇게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니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얘기 일부러 꺼내지 않는다고요. 귀여운 동생을 보는 형의 시선으로 아오바의 투정아닌 투정을 들어주는 미카도의 웃는 얼굴이 문득 거슬려 얼굴을 휙 돌렸다.


"…그러는 선배는, 오리하라 이자야한테 고백받았으면서."


조용히 중얼거린 말이지만, 미카도에게는 충분히 들렸을 테다. 일부러 그정도 크기로 말했으니까.


주위의 소란함에 묻혀 주위 사람들이 아오바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미카도가 아오바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할 말 다 해놓고, 이제야 태클? 너무 늦잖아."


웃으며 건내는 미카도의 말에 선수를 쳐 애인의 자리를 당당하게 가져간 이자야의 얼굴이 떠올라 심사가 뒤틀린 아오바는 무심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치만, 사실이잖아요."


무심코 튀어나온 제 말에 당황한 아오바가 쭈뼛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선배가 고백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요.


하지만 이건 경우가 틀리잖아? 나는 고백받기 전부터 그 사람을 알고 있었고, 충분한 호감도 있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OK한 것도 아냐. 나도 충분히 고민해보고 결정한거야.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고."


미카도의 말에 절로 표정이 찌푸려진다. 그 인간에 대해 이야기 꺼내지 말아요. 듣기 싫어요. 선배 입에서 그 인간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싫어요. 그만 둬요. 그 인간보다도 제가 더 선배를 좋아해요. 사랑해요. 선수를 빼았긴 것뿐에요. 그런데 왜 자꾸 절 괴롭히는 거에요, 선배? 그만해요……듣기 괴로워요. 그런 심정을 애써 속으로 꾹꾹 눌러담아, 표정을 정리한다. 장난기 어린 후배의 얼굴을 만들어 올린다.


"부러워죽겠네요 정말. 선배는 솔로 염장지르는데 한 재주 있으시네요."

"어라? 고의는 아니었어, 미안……."

"이미 늦었어요. 솔로의 가슴에는 이미 크나큰 스크래치가……."

"미안하다니깐;;"

"그럼 맛있는 거라도 사주세요~ 위로선물!!"

"하아…알았어. 뭐가 먹고 싶은데?"

"으응……저희반 여자애들이 얘기하던 엄청 맛있는 와플가게가 있거든요? 거기 와플이 기막히게 맛있대요. 거기 와플 먹고 싶어요! 사주실 거죠? 네에?"

"알았다니깐. 일단 쿠루리와 마이루의 선물을 고르고 나서 가자. 어딘지는 알지?"

"당연하죠!"


장난스러움으로 어물쩍 넘어갔지만, 와플가게에 가는 길 내내 아오바는 마음껏 이자야를 씹어대고 있었다. 선배를 채가다니, 용서못해 오리하라 이자야!!! 꼭 뺐고 말테다!!


물론, 겉으로는 미카도에게 생글생글 웃어주고 있었지만.

전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오리하라 이자야는 들고 있는 서류의 내용에 고개를 갸웃했다. 펜을 들고 있는 오른손에 안경이 부딪쳐 아직도 이자야가 익숙해지지 않은 안경의 존재를 알렸다. 이자야는 약하게 도수가 들어간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서류를 들여다 보았다. 역시 이상한데, 이거?



“어―이, 나미에양.”


“…뭐야. 그리고 ‘-양’이라던가 기분나쁜 거 내 이름 뒤에 붙이지 마.”


“이거 말인데. ”


“응? 어제 8시 약간 지났을 때 너한테 넘긴 거잖아. 그게 왜? 난 네가 원하는 형식으로 제대로 정리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냐, 바쁜데 불러서 미안. 하던 거 해.”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나참. 볼일도 없는데 왜 불러?”



삐딱하게 대꾸한 나미에가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사사삭.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단순히 시선이 옮겨갔던 오른손이 펜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종이에 글자를 채우는 과정을 흘깃 쳐다보다 다시 자신이 왼손의 서류로 돌아왔다.



잠시 서류를 빤히 바라보던 이자야는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받이에 걸어놓았던 이자야의 심볼과도 같은 퍼 코트를 걸쳐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미에는 그런 이자야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가 칼같이 작성중인 서류로 눈을 고정했다.





*





이자야는 중간에 들렀던 마트에서 구입한 참치 통조림들을 넣은 비닐봉투를 한 손에 들고 익숙한 거리를 지나, 주택가로 향했다. 익숙한 발걸음은 경쾌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자신이 목적한 허름한 아파트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누구세요?”


“나야, 미카도군.”


“…….”


“……미카도군?”



평소라면 목소리를 들려준 시점에서 문을 열어주었을 미카도가, 어째서인지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여전히 굳건히 닫힌 문에 이자야가 ‘새로운 장난인가? 하지만 미카도군이 이런 장난을?’ 의아함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문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건너왔다.



“저를 아셨던 분인가요?”


“―뭐?”



반사적으로 한 마디를 흘리듯 내뱉은 이자야는 드물게 당황해, 그 잘만 돌아가던 머리가 순간 정지했다. 이렇다할 답을 내놓지 않고 침묵한 상대에게, 미카도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죄송하지만, 문은 열어드릴 수 없네요.”



이자야는 잠시 멈췄던 머리를 풀가동시켜 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는데 성공했다. 류가미네 미카도와 이어지면, 한없이 현실감이 떨어지는 단어를. 그것을 이자야도 입밖으로 내기 전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모색해봤으나 결국 대체할만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기억상실, 인거야? 문을 못 열어주는 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미카도는 답이 없다. 그 까닭을 대충 이해한 이자야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지인이었다는 것을 알려줄 방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기다려봐. 아는 사람이라는 거, 증명해줄테니까. 휴대폰 지금 가지고 있어?”


“네?”


“지금 전화 걸게.”



이자야는 몇 번의 터치로 미카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조로운 연결음이 들린다. 문 너머, 작게나마 미카도의 휴대폰 벨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연결음도, 벨소리도 그쳤다. 이자야는 일부러 문 가까이에 몸을 기댔다.



“여보세요, 미카도군?”


-네. 그러니까…오리하라씨?


“이자야면 돼. 이제 아는 사이라는 거 알겠어? 너네 집을 확실히 알고 있고, 휴대폰 번호도 알고 있고, 네 휴대폰에 등록도 되어 있을테니까.”


-알겠어요. 이자야씨를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잠깐만요, 문, 열어드릴게요.


“전화는 끊고.”


-아, 네.



휴대폰을 주머니에 정리해 넣자,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끼이익 열린다. 과연, 외관 그대로의 효과음. 약간 열린 문틈으로 우선 상대를 확인하려는 생각인지 미카도가 잠시 주춤하며 바깥을 내다 보았다. 이자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야, 라는 게 내 심정이지만, 미카도군은 다르겠지?”



본래도 그렇게 숫기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긴장하는 미카도의 모습은 처음 만났을 때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이자야는 미카도가 허둥대며 내온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곤 피식 웃었다.



“그렇게 허둥대지 않아도 돼.”


“그래도 일단은 손님이고…….”



미카도가 정좌한 채로 맞은 편에 앉아있는 모습에 다시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하하, 나 꽤 자주 여기 놀러 왔었어.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줬음 하는데? 내가 더 민망하잖아, 이러면.



“죄,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단 거야, 미카도군. 그렇게 미안해하면 내가 더 미안해진다고. 그러는 미카도군 족이, 오히려 기억이 날아가버린 것 치곤 잘 적응하고 있는 거 아닌가? 기억상실이라면……다 잊어버린 거야?”



미카도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다는 아니예요.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 막 됐을 무렵까지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라서……. 솔직히 여기까지 침착해진 제가 신기해요.”


“뭐, 미카도군, 꽤 머리회전도 빠르고 적응력도 좋았었으니까. 기억이 없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라는 거 아닐까?”



이자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서히 긴장을 푼 미카도가 이자야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이야기도 조금씩 꺼내기 시작했다. 생일 선물로 컴퓨터를 받기로 했던 일, 학교에선 아이들이 화려한 이름을 가지고 자주 놀렸던 일, 6살 여름에 ‘이 물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라는 호기심에 근처의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가보다가 길을 잃어서 3일 동안 숲속을 헤맸던 일…….



“그때, 어른들에게 업혀서 마을로 돌아왔을 때, 마사오미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어디갔었냐고, 걱정했다고,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놀랐다고 저를 껴안고 펑펑 울었었어요.”


“마사오미라면, 키다 마사오미군?”


“마사오미를 아세요?”


“물론이야.”



미카도가 조금 우울한 얼굴이 되어 신원확인 후 계속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다야는 그 표정의 이유가 짐작이 되지 않아서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지금의 미카도군은 이케부쿠로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키다군의 도망 사실도 모두 모를텐데 왜 저런 우울한 표정을?



“왜 그래, 미카도군?”


“……사실 휴대폰 뒤적이다가 전화번호부에서 마사오미를 발견했어요.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마사오미가 알고 있는 미카도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사오미가 하는 이야기를 잃어버려서, 모르고 있으니까 실망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때문에요.”


“그래도 두 사람 소꿉친구잖아? 그거 알아? 미카도군, 키다군이 오라고 해서 이케부쿠로까지 왔다는 거. 듣자하니, 키다군이 자기가 라이라 학원에 갈테니까 미카도군도 오라고 말했었다고. 그리고 미카도군도 그 말에 한 방에 넘어왔다던데? 그 정도로 친한 두 사람이야. 걱정을 해주면 해주지, 실망하진 않을텐데.”



미카도를 달래줄 말을 하면서도, 이자야는 현실을 직시하고 짊어지는 대신 도망을 택한 키다 마사오미가 그 전화를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미카도가 차라리 전화를 걸지 않았던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전화를 걸어도 걸어도 받지 않는다면, 분명 상처받았겠지. 지금의 미카도군에게 이곳에서 의지할만한 사람은, 키다 마사오미 정도일 테니.



“그렇겠지만, 저는 무서워요. 제가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니까. 이자야씨나 소노하라씨도, 아오바군도, 모두 저를 보는 눈빛은 아는 사람을 보는 그런 시선인데, 정작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서워요. 미안하고. 잘 알던 사람에게 타인을 보는 시선을 받으면, 분명 슬플테니까요.”



사이의 거슬리는 이름들이 귀에 들어왔다 금방 흘러나갔다. 이자야는 잔뜩 풀이 죽은 미카도의 모습에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들 미카도군에게 실망할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가 있어요?”


“왜냐면, 다들 미카도군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어쩔 수 없는거야!”



이자야가 호언장담을 하자, 그의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아이같은 언동의 갭에 미카도가 웃음을 흘렸다. 웃었어? 웃었어? 그런 미카도의 반응에 일부러 이자야가 아이같은 말투로 대응하자, 미카도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요, 이자야씨.”


“이게 좀 기운 났어?”


“네.”



미카도가 미소하며 대답하자, 이자야가 미카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웃는 미카도군을 다들 좋아하는 거야.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우울해하지 마. 그럴수록 다들 기운 못낼 걸?”


“…이자야씨도요?”


“당연하지!”



어릴적 이사갔던 소꿉친구 마사오미의 부추김에 이상할 정도로 쉽게 넘어갔던 건, 단 한 번도 나가본적 없는 마을에서 더이상 가슴 깊은 곳부터 두근거리는 비일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물론 다라즈라는 커다란 비일상을 손에 쥐고 있긴 했지만 미카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연히 다가와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원했다.


그것이 자신의 앞에서 일어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해도.


-


"마사오미, 또 헌팅같은 걸 하고 있는거야?"


어째서 약속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사오미가 헌팅에 실패하는 모습같은 걸 봐야 하냐구….


미카도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 뒷말까지 들어버린 마사오미는 '나 지금 빈정상했다~?'를 얼굴에 가득 써붙인다.


"미카도 너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헌팅같은 거라니, 헌팅당한 사람들에게 실례잖아! 게다가 이 미모의 내가 말을 걸어주는데 뭐가 문제란거냐!"


"그런 말은 성공하고 나서 해야지 신뢰받을 수 있는거야. 내가 본 바에 의하면 마사오미의 헌팅 성공률은 100퍼센트 실패였는 걸. 이런데도 내가 마사오미의 근자감을 믿어야 해?"


미카도가 나름의 논리를 펼치며 반박하자 마사오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 표정은?"


"………아니 뭐라고 해아할까……너 너무 차갑다고! 막 상경했을 때의 그 퓨어함은 어디로 사라져버린거야?!"


마사오미의 폭발에도 미카도는 홀로 유유자적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이 미카도, 대답은!? 마사오미는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더더욱 말을 주절거리며 미카도의 곁에서 핸드폰 사용을 방해해댔다.


처음엔 건성건성 받아주던 미카도였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계속되는 집요한 마사오미의 주절거림에 미카도는 핸드폰에서 시선을 땐다.


미카도가 드디어 자신에게 반응했다며 반색하는 마사오미는 이미 자신의 본래 목적을 잊어버린듯 했다.


"마사오미때문인게 아닐까?"


"응?"


"뭐 내가 같이 다니면서 영향을 받을만한 사람이 너말고 또 있어? 설마 소노하라의 영향이라고는 못할 거 아냐. 그러니까 너겠지."


미카도의 무덤덤한 발언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자신이 미카도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방해했던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마사오미가 뒤늦게 주어진 미카도의 대답에 아우성친다.


"이몸의 어디가 그렇게 차갑단 거냐 미카도! 내 하트가 얼마나 버닝하고 핫한데! 이런 날 닮았다면 당연히 뜨거운 남자가 됐어야 마땅하다고! 너처럼 쿨시크한 차도남이 될 이유가 없는데!"


"언제는 쿨다운하는 16세라더니?"


미카도의 냉정한 태클에 마사오미는 일부러 휘청거리며 자신이 데미지를 받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미카도를 웃겨보자는 의도가 강한 오버액션이었다. 동작을 크게 하는데 집중하다 발을 삐끗해 허공에서 허우적.


"우왓!!;;"


팔을 휘두르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용을 쓰던 마사오미는 앞으로 쏠린 무게중심을 따라 몇걸음 걸어나갔다. 


"마사오미 앞!"


겨우 균형을 잡고 서려다가 미카도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마사오미의 눈앞에 새까만 옷이 클로즈업 됐다.


"엇 죄송합니다--이자야씨…?!"


가볍게 부딪히고 나서 반사적으로 사과했던 마사오미는 자신과 충돌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키다 마사오미군?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거야? 사람 무안하게."


그런 마사오미의 반응에 재밌는 장난감을 보는듯한 시선을 주며 피식 웃더니 시선을 돌렸다.


이자야의 시선에 걸린 소년은 남자애치곤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사오미에게 다가와 놀란 그를 다독여 주는 모습에 신기한 것을 봤다는 시선을 준다.


"류가미네 미카도군? 키다군과 같이 라이라 학원이랬지? 얼굴색이 좋은게 즐겁게 보내고 있나보네-."


"네에……."


미카도가 자신에게 돌려진 이자야의 말문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미카도에게 이자야가 한마디 더 꺼내려고하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주제에 둘 사이로 마사오미가 끼어들었다.


"이 녀석에게 특별한 볼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요."


마사오미의 경계심 가득한 시선에 이자야가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로 마사오미를 내려보다가 자신에게로 시선을 옮길 때는 표정을 정리해 미소짓는 것을 미카도는 놓치지 않았다.


'뭐였지…? 굉장한 표정변화를 본 것 같은데…어째서 마사오미에게 그런 표정을…….'


미카도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에 이자야는 저번에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다라즈라고 뻐기던 녀석의 머리를 밀어주고, 막 통성명했는데 시즈가 쓰레기통을 던져서 날아갔지. 그 다음에는 언제나처럼……. 하핫 시즈랑 싸우는 걸 보고 겁먹어버렸나. 게다가 키다군이 아무말 안 했을리도 없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키다군? 난 일때문에 잠시 이케부쿠로를 자나던 것 뿐이었어. 그런 나에게 부딪혀 온 건 키다군쪽이었다고."


뭐, 두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는 일부러 다가가 본 것도 사실이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는 말을 해서 자신의 상황이 불리해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잘 알고있으니까.


마사오미가 미카도를 자신의 등뒤로 슬쩍 물리는 것을 본 이자야는 웃고 싶어 졌다.


'재미있네. 키다군에게 있어서 미카도군이란 예전의 사키를 피드백 시키는 걸까나. 내가 미카도군을 꼬여내서 다시 한 번 그때와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뭐, 아주 틀린 짐작은 아니었지만서도.'


이자야는 오늘은 더이상 접근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차피 저렇게 날이 서있는 마사오미를 곁에 두고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미카도도 저렇게 잔뜩 경계하고 있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굴러가길 바라는 건 무리니까.


"그냥 마주쳐서 인사한 거뿐이니까 너무 그러진 말라구. 게다가 슬슬 시즈가 이쪽을 돌 시간이니까 어차피 빨리 이 자릴 뜨는게 나로서도 귀찮은 일을 피하는 거니까."


이자야는 웃으면서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바이비!"


"안녕히가세요…"


입을 다물고 이자야의 두통수를 노려보는 마사오미와는 대조적으로 미카도는 이미 등을 돌려 제 갈길 가는 이자야에게 목례까지 곁들여 인사했다.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마사오미가 태클이다.


"저 사람한테까지 예의 지킬 필욘 없어 미카도."


"그치만…."


"다시 말해두지만 오리하라 이자야와는 절대 가까워지면 안 돼."


마사오미가 워낙 단호한 태도로 말하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주긴 했지만, 내심 두근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리하라 이자야가 위험하다? 그정도는 지난번 만났을 때 충분히 실감했다. 헤이와지마 시즈오와 대치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나이프를 들이대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으니까. 그런 그가 솔직히 두려운 감도 없진 않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비일상적인 면에 두근거리는 자신이 있었다.


'위험해…….'


게다가 이자야는 아름다웠다. 마사오미가 듣는다면, 그런 외모지상주의에 물들다니! 라며 또 아우성이겠지만. 미카도도 자신이 아름다운 것에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이런 자신에게 아자야는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마사오미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미카도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라는 거지! 어이 미-카도! 내말 듣고있어?"


"어, 응."


마사오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주자 찔리는 것이 있는 미카도는 슬쩍 시선은 피했다.


마사오미는 다시 시선을 거두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넌 옛날부터 담대한 성격도 아닌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 겁이 없었지. 그치만 오리하라 이자야에게는 절대로 다가가지마. 그 사람은 정말……구역질 날만큼 뒷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니까."


마사오미가 그에 대해서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에 더 시선이 간다고 하면… 마사오미가 상처받을까?


"소문만으로 단정짓기도 좀…."


미카도가 마사오미의 굳은 표정에 말끝을 흐렸다.


마사오미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입밖으로 내는 태도로 쐐기를 박았다.


"그정도로 추잡한 소문이 아무런 근거없이 퍼질거라고 생각해? 나---아니, 여하튼 그는 네가 가까이 다가갈 일도 없겠지만, 가깝게 지내서 너에게 좋을 일 하나도 없을거야. 신주쿠로 옮겼다더니 왜 이렇게 자주 이케부쿠로에서 목격되는지 모르겠지만."


"볼일이 있어 온거라고 했잖아?"


"그 볼일이라는 게 과연 어떤 일인지……."


"너무 과민한 거 아냐 마사오미?"


우리 점심도 안 먹었는데 밥먹으러 가지 않을래? 미카도가 나름대로 열심히 말머리는 돌렸다. 결정적으로 배가 진짜로 고팠기에 마사오미는 이자야에 대한 것을 털어냈다.


"좋았어! 안내는 나에게 맞겨라!"


"맛집으로 부탁해`"


"당연하지!"


-


오리하라 이자야에게 있어 인간이란 시즈오를 제외하면 누구든지 흥미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박애의 대상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관심을--을 모토로 삼고 있긴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쾌락주의자에 상대주의자였다.


그렇기때문에 반드시 공평하지는 않다. 그는 아이가 여러개의 장난감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인간중에서도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있었다. 


예를들어--류가미네 미카도.


동안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수수하고 단정한 외모. 성적은 우수한 편이고 학교에서는 학급임원을 맞고 있다. 교사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은 편. 혼자 상경해서 현재는 작은 아파트에서 자취중. 넷비즈니스로 꽤 넉넉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특이점.


라는 것이 소년의 평범한 일면.


그리고 다른 일면에서 소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세력을 불리고 있는 무색투명의 컬러갱 다라즈의 창시자.


우등생과 컬러갱의 창시자, 이 두 가지 사이의 갭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인간이란 정말로 재미있어!


이자야는 핸드폰을 꺼내 소년에 대한 정보를 다시 훑으며 눈을 빛냈다.


'재미는 지금부터라고, 미카도군!'


-


오리하라 이자야의 의중을 도저히 읽어낼 수 없어 답답하다. 그 속내를 결코 타인에게 비추지 않는 적안. 싸늘한 눈동자와 어울릴리 없는---객관적으로 보아 상냥한 미소.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으니까 더욱 답답하다.


미카도가 얌전하고 소심한 인상인데 비해 의외로 독설가라던가, 겁이 없는 성격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들은 피하는 일들에 종종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다가서려고 하는 무모한 면이 있다던가, 나름대로 특이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이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보통 있지 않아? 한두 가지쯤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닌데.


'어째서 이자야씨가 미카도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냐고!'


침대에 누워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이자야의 얼굴과 미카도의 얼굴을 나란히 떠올려봐도 어떤 연관성도 없다--아니, 하나 있지, 공통분모.


'…그건 나.'


설마 이자야가 미카도를 이쪽으로 끌고 들어와 휘저을 셈이라면? 사키와 같은 일이 두번 다시 없을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절대로 막아보일테다!!"


"마사오미 조용히 히지 못하겠니!"


어머니의 태클에 입을 다문 마사오미는 화를 억누르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자야를 개운하게 두들겨 패는 꿈을 꿨다.


“도망치자.”


“도망……?”


“그래, 도망. 어차피 한동안은 이 근방은 소란스러울거야. 그러니까,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만.”



이자야가 품속의 미카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여전히 미카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되물었다.



“하지만 이 소란은 어디까지나 제가 중심이에요. 나가면, 바로 들킬거예요. 다라즈의 시선은 어디에든 있으니까. 그게, 다라즈라는 조직의 원동력이니까요.”



미카도가 담담하게 내뱉는다. 지금, 이 상황이 된 것도 그 탓이고요. 일단은 이자야씨의 솜씨로 이자야씨의 맨션에 어떻게든 눈에 안 띄고 들어왔지만, 이미 이 근방에까지도 다라즈의 감시가 뻗어나왔어요. 제가 만들었지만, 참 가공할만한 조직이네요. 이렇게 겪어보니 더더욱 몸으로 실감해요.



담담히 고하는 목소리에 어린 씁쓸함을 느끼며 이자야는 미카도를 힘주어 안았다. 얌전히 안겨있는 미카도에게 이자야는 칸라로서의 가벼움도, 정보상으로서의 배타적인 태도로 모두 제쳐두고, 오리하라 이자야로서의 진중한 목소리로 조근조근 미카도의 말을 받는다.



“미카도군은 그 다라즈의 창시자야. 이 소란이 가라앉는다면, 나는 미카도군에게 다시 다라즈를 안겨줄거야. 왜냐면, 미카도군에게 다라즈는 아이덴티티니까. 그 정도로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난 미카도군이 이 소란에서 무사하길 바라. 그리고 그러기 위해 도망을 제안하고 있는 거야. 미카도군은 날 믿지 못하는 걸까?”


“이 경우엔 신용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대체 어떻게 도망을 가실거죠? 제가 투명인간이라도 되지 않는한은, 어렵지 않을까요? 사람의 시선이란 거, 의외로 속이기 힘든 거니까요.”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 제안한거니까.”




*




“잘 부탁해, 나미에.”


“뭐, 고용주의 부탁이기도 하고, 어차피 나도 갖혀버렸고, 이럴 바에야 일단 당신네들을 따라가는게 나을 것 같아서 협조하는 거 뿐이야. 착각하지 말아줄래?”


“이유야 어쨌든!”



나미에는 테이블에 온갖 화장품과 도구들을 좌르륵 늘어놓고 자신과 코앞에서 마주보도록 세팅한 의자에 우선 미카도를 앉혔다. 세안용 밴드로 머리카락을 모두 넘기고 긴장한 표정으로 앉은 미카도에게 나미에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어,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메이크업을 할거야. 화장이 끝나면 가발을 쓰는 걸로 일단 완료, 란 거지. 알겠어? 아까도 말했지만, 메이크업은 어디까지나 전제적인 인상이나 분위기 정도밖에 변하게 못해. 그걸로도 어지간히 뜯어보지 않는 한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는 할 거지만.”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나미에는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이걸 바르고, 저걸로 그리고. 캔버스 위를 노니는 붓마냥 과감한 나미에의 터치를 곁에서 흥미롭게 보고 있던 이자야는 “다 됐어. 눈 떠도 돼.” 라며 나미에가 손을 내린 후의 미카도의 얼굴에 감탄했다.



“……미카양 예쁘네!”



이자야의 농담 섞인 말에 미카도가 나미에가 씌워준 긴 생머리 가발을 고쳐쓰며 눈을 떴다. 그리곤 볼을 부풀리며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미카양이라고 하지 마세요, 이자야씨……어? 이게 저라고요? 진짜 완전 여자애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미카도의 모습에 나미에가 당당하게 한 마디한다.



“당연하거 아냐? 네가 누구 손을 거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신기하네요. 제 얼굴이 아닌 것 같아.”



미카도가 이자야에게 자리를 넘기기 위해 나미에의 앞을 벗어나면서도 나미에가 들고 있던 거울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긴 생머리 가발에, 메이크업, 그리고 원피스 한 벌. 그것이 더해졌을뿐,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미카도의 표정에 이자야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들의 화장술이란 정말 신기하지. 나도 동의해, 미카양.”



미카도의 볼을 콕콕 찔러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자야에게 싸늘한 나미에의 목소리가 날아와 박힌다.



“이젠 너야. 빨리 앉아.”



그렇게 시작된 이자야의 메이크업도 순조롭게 진행돼, 미카도와 마찬가지로 완료를 고했을 때, 이자야는 원래도 섬세했던 이목구비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길을 가면 남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만한 초미녀의 탄생 장면을 목격한 미카도는 “진짜 칸라가 되어 버렸어….” 라고 중얼거리며 이자야를 관찰했다.



이자야는 나미에의 코디 위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라며 퍼 코트를 걸쳐서 나미에에게 “어이없어. 애써 꾸며놨더니 그 퍼 코트를 입는 거야? 그 칙칙한 걸? ……당신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퍼 코트에 맞춘 옷도 준비는 해두긴했지만, 이해할 수 없어. 패션감각이 없는 것도 아니던데. 게다가 ‘오리하라 이자야=퍼 코트’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걸 모를 것도 아닌데 그걸 고집하는 건 또 뭐야? 정말 바보아냐?” 라며 한 소리 얻어 들었다.



“우와, 나미에 여전히 잔인하네. 그래도 퍼 코트용 코디도 따로 준비한 걸 보면 의외로 상냥함?”


“우웩. 당신에게 그런 말 들어도 안 기뻐. 기분 나빠. 취소해. 당장.”


“사람이 모처럼 좋게 말해 줬더니!”


“세이지가 해주는 말도 아닌데 필요 없어. 그리고 저리 가. 이젠 내 차례니까.”



그 말에 미카도가 화들짝 놀란다. 야기리씨도 하는 건가요? 나미에는 이젠 어딜봐도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는 미카도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중간하게 변장해서 들키면 나도 입장 곤란해져. 확실히 해서 이 소란이 가라앉아야 나도 세이지를 보러갈 수 있을 거 아냐.



미카도에게 적의를 확실하게 드러내던 이전보다 한층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는 나미에에게 미카도가 조금씩 호의를 가지는 것 같자 이자야가 슬쩍 끼어든다.



“그럼 우린 잠시 피해있을테니까 다 되면 불러.”


“흥, 그럼 옆에서 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에이, 나는 미카양만 있으면 돼.”



칸라의 탈을 쓴 이자야가 미카도를 끌어 안아 볼을 부비며 웃는 걸 본 나미에는 못볼 걸 봤어, 플러스 저런 거에게 걸리다니 참 불쌍한 애야, 라는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을 읽은 미카도는 그녀의 적의가 가라앉아 기뻐해야할지, 저런 눈빛으로 바라볼 정도로 자신의 처지가 불행한 건지 고민했지만, 이자야는 개의치않고 미카도에게 열렬한 스킨쉽을 시도하고 있었다.



“…변태.”


“똑같이 돌려주지, 브라콤.”



두 사람이 으르렁 거릴 듯하자 미카도가 이자야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방으로 들어가자고 채근했다.



“죄송해요. 이자야씨는 제가 데리고 들어갈게요.”


“뭐야 미카양?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칸라는 두근두근, 꺄아♡”


“장난치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애도 아니고,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욧!”


“그야 미카양이 그럴 때 더 나한테 신경을 쏟아주니까♡”


“두 사람 빨리 들어가지 좀? 닭살 돋아.”


“이자야씨 빨리 들어가래잖아요!”


“우왓!”



미카도가 방문이 열린 걸 힐끔 확인하더니 온힘을 다해서 이자야를 방을 힘껏 밀어넣었다. 이자야도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대로 방안을 향해 돌진했다.



미카도가 그런 이자야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비싼 맨션답게 방음은 확실해서 거실은 조용해졌다. 분명 안에서는 미카도를 동정할만한 이자야의 뻔뻔한 성희롱이 벌어지고 있을테지만. 평소에도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능글맞게 굴던 이자야였으니 둘만인 방에서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제멋대로인 애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영락없는 변태 아저씨잖아.”

나미에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변장에 신경을 돌렸다.




*




긴 생머리와 글래머한 몸매, 그리고 타이트한 셔츠와 스커트 차림의 지적인 분위기의 미녀. 였던 나미에가 지금은 냉철한 눈매가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슈트가 딱 맞아 떨어지는 훤칠한 미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때? 감쪽같지?”



미카도가 나미에를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것을 듣고 있던 이자야도 꽤 놀란듯 순수하게 놀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이자야가 질투를 하지 않다니, 이정도면 성공? 나미에를 다시 살핀 미카도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한 마디 한다.



“야기리씨, 멋있어요!”


“그렇네. 나미에가 이렇게 멋있어지다니.”


“칭찬 감사.”


“야기리씨, 완전히 제 이상형이에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미카도가 나미에에게 계속 감탄을 하는 것에, 결국 배알이 꼴렸는지 이자야가 삐딱선을 탄 표정으로 내뱉었다.



“우와, 그건 미카도군의 동안 때문에 무리 아냐?”



크리티컬 히트.




이자야의 한 마디에 미카도가 금새 축 쳐졌다.



“…저도 아니까 그렇게 찔러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싶었다’라고 했는데. 이자야씨 바보!”


“미안미안. 미카도군이 너무 눈을 빛내서 그만!”


“됐어요. 어차피 저는 여자아이돌 체형에 동안이라서 다 무리~니까.”



미카도가 볼을 부풀리며 달래는 이자야를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 영락없이 새초롬한 소녀다. 이자야는 그런 미카도가 귀여워죽겠는지 답싹 달려들어 미카도를 껴안았다.



“미카양 귀―여―워―――!”


“하나도 안 기뻐욧!”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미에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소년을 희롱하는 변태아저씨가 이번엔 소녀를 희롱하는 변태아저씨가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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