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들 치정싸움에 자꾸 마왕님을 얽혀 넣는 것은 다 저의 농간탓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이런 미천한 인간이 마왕님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위지만 넘 재미따ㅋㅋㅋㅋㅋㅋㅋㅋ악ㅋㅋㅋ
"벤…님.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난 괜찮으니 어서 이 녀석을 데리고 피해라."
금발이 살짝 흔들린다. 소년은 공주를 받아 안았다. 청년은 소년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가야하죠? 항상 가장 다치는 것도 당신이었어. 그런데 또 당신만, 당신만 사지死地로 가야하는 거죠? 어째서냐구요!"
로엔이 외친다. 적이 들을 수도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인정하지를 않아. 격해진 감정을 담아서. 벤의 얼굴을 응시했다. 벤의 얼굴은 진지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아무 말 안 하고 그저 믿어 줄 수 없는 것은, ─적이 마왕이기 때문에.
"괜찮아. 게다가, 마법사인 네가 이렇게 흥분하면 안 된다. 막둥이 너는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나의 속도를 따를 이는 없어. 그렇다면 치고 빠질 때에도 가장 유리한 것은 나다.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거야. 그러니까, 그 녀석을 데리고 도망쳐. 알았지?"
"…벤님…!"
"날 실망시키지 마라, 로엔. 언제까지 바보처럼 굴테냐."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하고 있는 벤이었지만, 일단 최우선 순위는 공주와 최연소자인 로엔을 무사히 대피시키는 것. 벤은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로엔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슬픈 눈동자가 흔들리는 채로, 로엔이 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벤은 이미 문을 닫기 위해 문 밖에 있었다.
"…벤님!"
벤은 웃었다.
돌문이 '그그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볼 수 있길 빌어다오."
로엔은 자신이 발동시킨 '텔레포트'의 마나가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문이 닫힐 때까지 벤을 바라보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닫힌 문과, 건너편에서 빛과 함께 사라지던 일행과, 남은 자신과, 다가오는 적. 벤은 의연한 얼굴로 그 돌문에 단검으로 뭔가를 세기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돌이 깍이는 소리가 멈추었다. 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새겼는지 전투를 대비하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너 혼자인가? 믿을 수 없군. 어째서 혼자 남은거지?
벤은, 웃었다. 그리고 외쳤다.
"난 내가 지킬 것을 못지키는게 죽는 것보다 싫거든!"
몇 합을 겨루었던가. 마왕의 공격은 매섭기 그지 없었다.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괜히 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강했다. 그의 순수한 마기는 그 자체로도 손색 없는 훌륭한 무기로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마기로 오염시켰다. 게다가 그는 그런 마기를 검의 형태로 쓰고 있었는데, 그 예기 또한 대단했다. 대륙의 어느 명검을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더 훌륭하면 훌륭했지, 못하지는 않을 명검 중의 명검이었다.
게다가 마왕의 검술을 뛰어나, 그의 맹공세에 벤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벽에 처박혔다.
"…으윽……, 크흐……."
죽은 피를 게워낸 벤이 목에 피가 엉겨붙어 숨쉬기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곤 힘들게 숨을 쉬었다.
-괴로운가.
"이, 쿨럭…, 미친 새끼야, 너 같으면, 크… 잘도 안 아프겠다……."
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벽에서 미끌어져 떨어진채로 겨우사리 입만을 열었다. 단검 두 자루를 빼면 별다른 무기도 소지하지 않는 습관 덕에─속도 유지를 위해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이제 벤에게 남은 무기라곤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다. 그나마도 방금의 격돌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늑골은 가볍게 서너 대는 나간 것 같은데 슬슬 열이 올라오는 것 같다. 마왕의 공격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왼팔은 깔끔하게 동강났다. 내 몸에 당한 기술이지만 대단하단 말이 절로 나오는 깔끔한 공격이다.
게다가 이것이 봉인된 능력이라면, 마왕은 과연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지금은 변변한 육체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벤은 새삼스레 이 마왕을 봉인했다는 용사에게 존경심이 가득담긴 눈빛을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쿨럭…!"
속에서 치솟는 핏덩이를 게워냈다. 목구멍을 타고 혈향이 올라온다. 이미 상당한 피를 흘려버려 눈앞이 어지럽다.
마왕이란 작자는 공격도 멈춘채 이 쪽을 주시하고 있다.
벤은 통증과 함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습게 보는거냐."
-그렇게 느껴지는가.
"크……쿨럭…, 그럼… 뭐라고, 하지…? 쓰러트릴거면…, 어서 와라. 난 더, 싸울 수 있다고……."
벤이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훔쳐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웠지만 눈빛만큼은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힘이 안 들어가는 손에 애써 힘을 주었다. 과연 이 상태로 때린다고 해서 상대에게─그것도 최강의 실력을 가진 자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대로 쓰러져서 당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다.
"자, 덤벼."
-좋다, 인간. 그렇다면!
호쾌하게 외친 마왕과 벤이 또다시 격돌했다.
벽부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벽에는 처참할 정도로 피가 난자해 있었다. 피는 뭔가에 쓸린듯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는데, 그 아래는 벤이 피투성이인채로 늘어져 있었다.
온 몸의 뼈는 부러졌고, 피는 이미 치사량 이상으로 흘린 것 같다. 이미 고통따위를 느낄 수 없게 된지 오래다. 신경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 같다.
힘 한 줌 없이 늘어져 있었다.
죽기 전에 주마등이 스쳐지난다고 하던가.
벤의 눈 앞으로 파노라마처럼, 모든 일들이 스쳐간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단란했던 가족. 납치. 암살자로서의 혹독한 훈련들. 사부와의 만남. 카슬러의 성을 물려받은 일. 배신을 당해 성에 잡혀가 연극의 일행이 된 일. 공주에게 호의를 품게 된 일. 어느 순간부턴가 모험을 즐겁다고 여기게 된 자신. 그리고, 공주를 위해,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자신.
"…죽는…건가……."
-살고 싶나?
"이……크……."
뭔가 말하려는듯 발끈했지만 갑자기 몰려드는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 벤을 보던 마왕이 손─이라기보단 그저 마기의 덩어리 쪽에 가깝겠지만─을 뻗더니 이마를 쿡 찔렀다. 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공중에 부유하는 느낌을 받으며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던 차에 목소리, 아니 울림이 느껴졌다.
-내 말이 들리나.
-이건 또 뭐지. 이제 죽을 놈한테 말을 거는 의도를 모르겠군.
-말은 정말 잘 하는군?
-이 몸은 이래뵈도 말빨로 져본 적이 없다.
-호오, 그런가? 그런 의미에서 내 부하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마왕이 물었다. 벤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진지하게 이 놈이 마왕이 아니라 그냥 싸이코가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미쳤냐? 죽기살기로 싸워서-아니 이건 내 쪽 한정이지만, 사람을 다 죽여놓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거지?
-아아, 말 그대로다. 스카웃 제의라고 해두지.
-기각. 그냥 난 죽으련다.
잠시 침묵하던 마왕이 한 마디 흘렸다.
-그들이 도망갔다고 안심하고 있는 건가?
-!!!!
벤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혼부터 흔들리는 충격. 벤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마왕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부하가 된다고 한다면, 인간계 침공 때 세날 왕국만은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마왕의 말인데 믿으란 건가.
벤은 끝까지 의심했다. 영혼의 축부터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계산해보고 의심한다. 신중한 모습.
마왕은 실소했다.
-이래뵈도 왕이다. 아무리 마족이라 한들 약속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지. 굳이 따지자면, 인간들의 약속과는 다르겠지만, 피의 맹세에 가깝다고 해둘까? 그 정도의 신의도 없다면 부하를 거느릴 수 없겠지않나.
-…….
-자, 어때?
벤은, 눈을 감았다. 정확히는, 영혼의 상태니, 시각을 닫았다고 해야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