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해롱해롱 (4)

처음 뵙는 사모님은 은하와 정말로 똑같아서 깜짝 놀라버렸다. 부모와 자식 사이라지만, 이렇게도 닮을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뭐, 점장님과 은하만 같이 봤을 때는 두 사람이 서로 닮은 구석이 여기저기에 보였는데, 사모님과 은하는 안 닮은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 보였다.



덧붙이자면, 은하의 성격은 거의 85% 이상이 사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인 듯했다.(나머지 15% 정도는 점장님이 어리광을 모두 받아준 탓일 거라고 추측했다.)



사모님께서 상다리 휘어지게 차릴 거라고 했단 말을 점장님께 듣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식탁을 음식으로 점령시켜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큰 접시들 사이를 작은 접시들로 메워서, 그야말로 음식과 접시의 향연.



……그 양에 조금 기가 죽었더랬다.



「저…이걸 다 먹을 수 있는건가요…?」



하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사모님은 빙긋 웃으셨다.



「걱정마요. 분명 나중엔 빈 접시만 남는다니깐. 그러니까 마음껏 들어요.」



「네에…….」



워낙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토를 달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식탁에 앉은 이 인원에 이 구성으로 이 대량의 음식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모님도 점장님도 은하도 모두 마른 편으로, 도저히 저 많은 양을 소화시킬 수 있을 위장을 지녔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두 번 이렇게 차린 것도 아닌 것 같아,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나저나 론군, 정말로 잘 생겼네! 어쩜, 남자애 피부가 이리 하얗담?」



「론이 오빠 눈색, 잘 보면 파란색이다? 되게 신기하지? 혼혈이래~」



「어머어머, 인형같이 잘 생겼네, 그냥 조각이야 조각!」



사모님과 은하가 눈을 빛내며 론을 훑어 내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잘 생겼다’를 골자로 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점장님이 사모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보는 것을 보고 말았는데, 봐선 안 될 장면을 본 것 같아. 하고 조금 미안해졌지만, 사모님과 은하에게 효과가 없어서 괜히 무안해졌다. 점장님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겠다 싶어, 



「――저어, 저를 보는 것보단 이 음식들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데요. 게다가 사람을 면전에 두고 그렇게 말하면, 꽤 부끄럽습니다만….」



라고 말을 하긴 했다. 과연 먹힐까? 했는데, 그래도 손님의 입장도 고려해준 것인지, 두 사람은 오호호호, 하고 웃으며 론의 얼굴에 금칠하는 대화를 멈췄다.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점장님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슬슬 먹을까요?」



「엄마, 엄청 맛있어 보여요!」



「아무렴, 오늘은 엄마의 역작 중의 역작이란다~ 론군도 맛있게 들어요.」



「우리 엄마, 전직 요리사라서 되게 맛있어! 론이 오빠 많~이 먹어!!」



「모쪼록 맛있게 먹어주게. 우리 집사람 요리는 정말로 맛있거든.」



세 사람의 기대어린 시선을 받으며 론은 젓가락을 들었다.



쉼없이 젓가락을 놀려 입 안으로 음식들을 가져다 넣고 꼭꼭 씹으면서, 론은 멍하게 해윤이와 한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휴. 맛있긴하지만, 그냥 해윤이랑 한나 형이랑 스테이크 먹는 게 마음 편했을텐데.




“잘 먹었습니다.”



더 먹으면 탈날 것이 예상될 정도까지 먹고 나서야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리곤 식탁을 다시 보니, 그 많던 접시 위의 음식들이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은하네 식구들은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먹은 사람들답지 않게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어, 이 가족들의 위장 구조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론군 생각보다 잘 먹는구만?”



“그러게요, 우리집에서 이만큼 먹고 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데요.”



“우리가 좀 대식가여야지.”



“-정말로 잘 드시네요. 적은 양이 아니었는데…….”



감탄 섞인 말에, 식구들은 호쾌하게 웃었다.



“항상 듣는 말이라네. 다들 워낙 생긴 거랑 다르게 대식가들이라 손님들이 모두 기가 질려 하더라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약간의 소화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어느정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되고 나서야 론은 은하네 집 식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먹는 것밖에 안 했는데 이렇게 피곤한 건 또 처음이야……자고 싶다. 진짜 피곤해…’



그리고 이날, 론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을 둘둘 감고 숙면했다.




+ + +






【론아, 어제 맛있게 먹었어? 거기 스테이크 되게 맛있었는데, 너랑 못가서 조금 아쉽더라구. 네가 되게 좋아했을텓데…TAT】


〔엄청하게 환대받았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다는 말을 실감했달까. 맛있긴 했는데, 너무 과식한 것 같아.〕


〔사실 나도 스테이크 먹고 싶긴 했는데…거절 했던 건 정말 미안.〕


【그래? 체했다거나 하는 거 아냐? 소화제라도 챙겨줄까? 우리집에 있을텐데.】


【그리고그리고 다음엔 거기 꼭 가자*^^*】


〔아, 응. 나도 먹어보고 싶어진다.〕


【이제 곧 출근할 시간이지^v^?】


〔편의점에 또 쳐들어 오려고?--;;〕


【쳐들어 온다니, 난 엄연한 손님이야ㅇㅇ!!】



해윤이의 문자에 피식 웃은 론은 핸드폰 폴더를 닫고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곤 자켓을 걸치고 목도리까지 둘러 단단히 방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지금 시간은 오전 9시. 알바 시작 시간이 30분부터니까, 조금은 서둘러 걸어야 하려나. 평소보다 조금 늦잠을 자버려서 조금 초조해진 론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듯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그래봤자 집에서 출발한 시각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결국 평소 20분 걸리던 거리를 12분만에 도착했다. 뭐, 그다지 힘들지도 않고, 밖이 추워서 편의점 안이 따뜻하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이제 곧 론과 교대할 세정이 카운터에 늘어져서 손을 흔든다.



“어, 론이 왔냐? 오늘을 좀 빠른데?”



키득키득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지만, 밤을 샜다는 것이 그대로 피곤으로 뭉쳐져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집에 가면 푹 자긴 하지만, 역시 생체리듬을 거슬러서 활동하는 것은 몸에 무리라고, 언젠가 세정이 투덜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뭐 따뜻한 거 하나 마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따뜻한 음료가 들어있는 카운터 옆 작은 온장고를 가르키자, 세정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됐어됐어. 어차피 집에 가자마자 잘건데 뱃속에 뭐 들어있음 찝찝해서 싫어. 그 마음만 고맙게 받는다.”



그리곤 크게 하품한다. 흐아아암.



“나 슬슬 퇴근해도 되겠냐? 진짜 졸리다.”



“알았어요. 오늘따라 엄청 피곤해 보여요, 세정이 형.”



“어제- 후아아아암, 제대로 잠을 못잤어.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세정이 기지개를 켜더니 가방을 챙겨 카운터에서 앞치마를 벗고 비틀비틀 걸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론이, 세정이 벗은 앞치마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무슨 좀비 같아. 흐느적흐느적.”



“미안타 임마. 가엾은 좀비는 퇴장할란다.”



세정이 론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며 문질러 뒤업곤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간다.



“잘 자요.”



“오냐.”



세정이 나가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론은 세정이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곤 시선을 편의점으로 돌렸다. 앞치마를 입고 카운터 앞을 정리했다. 세정이 가고 나면 항상 잡다한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어서 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기 때문에, 카운터 정리는 이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과가 되어 있었다.



정리를 끝내고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자, 해윤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론아 너 딸기 좋아해?】



〔갑자기 왠 딸기? 뭐, 딸기 싫어하진 않는데. 왜 물어봐?〕



답장을 보낸 론이 다시 해윤의 문자를 읽었다.



‘이 녀석, 딸기 들고 쳐들어 올 것 같아… 여태까지의 행동 패턴이 너무 뻔해서, 차마 아닐 거란 생각도 안 들어…….’


'오리지널 > 해롱해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온 뒤 땅 굳는다 1.5  (0) 2012.04.11
비온 뒤 땅 굳는다 1  (0) 2012.04.11
소일거리  (0) 2012.04.11

【한나야…론이가 여친이 있는 것 같아】의아함과 당혹과 짜증이 한데 섞인 얼굴로 중얼거리는 해윤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곤【몰랐었는데…】하고 덧붙인다. 그 모습이 어찌나 궁상맞은지, 주위의 공기가 축 처진 듯한 느낌마저 든다. 25.【난 나름대로 론이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었나봐, 한나야.】40.【진짜 서운한 거 있지? 편소엔 꼬박꼬박 만나줬는데, 오늘은…】63.【론이한테 그 여자애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그 좋아하는 스테이크 먹자는 약속도 거부할 만큼?】82.【아니, 사실 나에게 귀띔이나 해줬었으면, 이렇게 서운하지도 않았을텐데…】98. 해윤이 테이블에 시선을 주며 땅이 푹 꺼졌으면 하는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00―――.


“이해윤.”


한나가 목소리를 깔고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가진 사람마냥 굴던 해윤이 머리 위로 “???”가 뜬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한나에게 눈을 돌렸다.


“너가 그렇게 우울해한다고 론이가 오냐? 그리고 걔 정도 되는 애가 여친이 있는 게 어때서? 그게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게다가 말이지, 그애가 여친이 아니면 어쩔거야? 그냥 친한 애면? 뭐, 진짜로 그 여자애가 여친이었다고 쳐. 그걸 너에게 말할 시간이 없었던 거일 수도 있는 거 아냐? 지금까지 봐온 론이 성격에, 때되면 알려줄 생각이었을 지 누가 알아? 말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지. 그치만 그거에 네가 그렇게 서운해 할 수 있는 입장이냐? 친하긴 친하지. 그래, 너랑 론이는 친한 편이야. 그치만 그거 말고는 없잖아. 만난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렇지? 게다가 론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걸 굳이 들어서 어따 쓰게? 니가 론이 아버지라도 돼?”


쌓였던 말을 우르르르 쏟아내는 한나의 모습에 놀라고, 신랄하게 자신이 했던 말을 꼬집는 것에 두 번 놀란 해윤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한나의 눈치를 쭈뼛쭈뼛 살폈다. 한나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이렇게 과민반응할 이유도 없었고, 그 기분을 한나에게 풀려고 했던 것도 없잖아 있었고…….


바짝 굳어서 눈만 굴리고 있는 해윤의 모습을 입 다물고 보고 있던 한나가 한숨을 흘리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궁상 그만 떨고 좀 먹으라고, 이 음식 함부로 대하는 나쁜 놈아. 비싼 스테이크가 다 식잖아.”


'오리지널 > 해롱해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온 뒤 땅 굳는다 2  (0) 2012.04.11
비온 뒤 땅 굳는다 1  (0) 2012.04.11
소일거리  (0) 2012.04.11

“론이 오빠~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구 가! 응? 엄마도 아빠도 다 좋다고 하셨구~”



은하가 슬슬 퇴근 시간이 다가와 분주해진 론이의 팔에 매달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론이 슬쩍슬쩍 팔을 빼며 자신의 퇴근 준비에 방해다, 라는 점을 계속 눈치 줬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하는 맹공격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요즘 외동딸의 고집 파워! 론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 만난 것으로도 충분히 알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군다는 건 정말로 론을 자기 집으로 데러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든 거절할 수야 있지만,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론군, 웬만하면 오늘은 거절하지 말아주게나. 집사람이 은하한테 무슨 얘길 들었는지, 자네를 꼭 만나고 싶다면서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봐야 겠다고 신나하던 걸.“



―은하의 아버지가 바로 이곳의 점장이기 때문이다.



거절한다고 자를 성정의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알바가 많은 론의 사정을 고려해서 시급을 다른 곳보다 높게 쳐주는 것 때문에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다. 물론, 시급 빵빵한 이곳을 놓치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그와 불편한 일이 되도록 없는 편이 좋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도 론이 쉽게 승낙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해윤이로부터, 은하가 들이닥치기 직전, 문자가 왔었기 때문이었다.



【론아 오늘 한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갈래? 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먹자^3^!】



알았다고 답장을 쓰려고 하던 차에 은하가 “앗, 오빠, 핸드폰에 한눈 팔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 봐!” 하면서 핸드폰을 빼앗아가 버린 통에 결국 저 문자의 답장은 보내지 못했다. 게다가 핸드폰을 뺐어 든 은하가 “오빠가 바람 피는지 확인해볼 거지롱~” 하면서 문자함을 열어 해윤이의 문자를 봐버린 모양이었다.



―이해윤? 한나? 뭐야? 이 이해윤이란 사람 여자지? 한나도! 같이 밥도 먹으러 가는 사이인 거야? 게다가 말투는 아무리 봐도 연상인데, 오빠 사귀는 사람 없댔잖아, 솔로랬잖아! 한 두 번 같이 다닌 게 아닌 투인데, 뭐야? 어서 사실대로 실토하세요!



운운하며 폭주해버린 은하에게 ‘이해윤도 한나도 어엿한 남자다.’라고 말할 틈도 없었고, 은하가 제풀에 지쳐 진정했을 때는 은하의 폭주에 휘말려 론도 정신없던 참이라 은하의 오해를 고쳐줘야 한다는 일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상황이 여기에 다다른 것이다!



“론이 오빠, 아까 해윤이란 사람한테 온 문자, 아직 답 안 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우리랑 같이 가자! 응? 응? 제발~”



“우리 딸 애가 이렇게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오늘만이라도 시간을 내줄 수는 없을까?”



간곡하게 부탁하는 두 사람의 합공에 론이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마음 써주신 분의 부탁이라 차마 거절하기가 어렵다. 해윤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이쪽으로―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심술쟁이야~ 난 몰라 난 몰라 내 반찬 다 뺏어먹는 거 난 몰라~



해윤이가 어제 열심히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하는가 싶더니, 그 결과가 이것인 듯하다. 



“오빠 벨소리 되게 특이하다……” 작게 감탄한 은하는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확 굳히며, “해윤이란 사람이잖아!! 꼭 거절해야 돼! 알았지!” 라고 대뜸 소리쳐서 점장-성호가 “으, 은하야, 너무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론군에게 너무 미안하잖니::” 하고 말리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론은 여전히 은하와 점장님이 투닥투닥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뒤로 하고 해윤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론아! 아까 문자 답장이 안 와서 말야. 오늘 먹으러 갈거지? 너 스테이크 되게 좋아하잖아.


“아,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 그말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문자 답 못했어.”


―그래? 한나도 내심 같이 먹으러 가는 거 기대하던 모양이던데……


“아, 한나 형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알았어…


“미안. 다음에는 같이 갈테니까, 너무 풀죽지는 마. 끊어.”


―응…….



전화를 받았을 땐 활기차던 목소리가 안 됀다는 말에 기세가 뚝 꺾인 것을 보니 엄청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나중에 만날 땐 뭔가 사과의 선물이라도 챙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곁에서 듣고 있던 은하가 활짝 웃는 얼굴로 론의 팔짱을 낀다.



“잘 했어! 론이 오빠 멋져~ 근데 한나란 사람 여자 아니었네? 형이라고 하는 거 보니깐…”



“어. 한나형은 키크고 잘생긴 훤칠한 미남이야. 거기에 의사였지? 아마.”



“우와, 만나보고 싶어~ 그래도 난 론이 오빠가 젤 멋지지만 말야~ 아, 그치만그치만 해윤이란 사람은 여자지? 연상의 누나일 거야! 연상인데 왠지 어려보이는 타입일 걸? 맞지맞지? 그치? 은하님의 감을 얕보지 마시라!!”



론이 은하의 말에 굳이 태클을 걸지 않는 이유는, 은하가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윤이에 대해서 상당히 제대로 분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괜히 그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뭐, 결론은 은하를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라는 것으로.



“근데 사모님이 뭘 차려주신대요?”



기왕 밥 먹을 거, 메뉴나 알고 가자. 라는 것이 현 하론의 심리 상태.







+ + +








론이가 저장된 단축 번호를 길게 누르자 통화 신호가 뜨면서 신호가 간다.



뚜-, 뚜-, 뚜- 



단조로운 소리는 달칵, 하는 소리에 밀려 핸드폰은 새로운 소리를 뱉어낸다.



―여보세요.


“아, 론아! 아까 문자 답장이 안 와서 말야. 오늘 먹으러 갈거지? 너 스테이크 되게 좋아하잖아.”


―아,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 그말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문자 답 못했어.


“그래? 한나도 내심 같이 먹으러 가는 거 기대하던 모양이던데……”


―아, 한나 형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알았어…”


―미안. 다음에는 같이 갈테니까, 너무 풀죽지는 마. 끊어.


“응…….“



들떴던 기분은 어느새 가라앉아 바닥을 쳤다. 게다가 수화기 너머, 론이의 목소리가 아닌 잡음으로 치부될 소리들의 내용이 신경쓰였다.



―해윤이란 여자는 냅두고 나랑 먹어야 돼! 얼른 거절해버렷~ 으, 은하야 들릴라!!;;; 들리라고 하는 말인걸~ 론이 오빠는 내가 찜했는걸~ 은하야ㅠㅠ!! 아이참, 아빠는 가만 있어 봐! 딸의 연애 사업을 방해하면……



기세등등한 여자애 목소리와 그런 여자애에게 쩔쩔 매는 남자의 목소리.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부녀지간에, 여자애는 론이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고, 론이의 선약 상대일테지.



“론이가, 여자 친구도 있었던 건가…몰랐는데…….”



나름대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한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런 말도 못해줄 사람이었나 싶은 맘에서 나온 약간의 서글픔과, 수화기 너머 여자애-은하라는 여자애에게 짜증을 느꼈다.



서글픔을 그렇다 치고, 왜 짜증이 난 걸까. 그 이유를 명확히 모르겠어서 한참을 고민하던 해윤은, “밥 먹자, 이해윤~” 외치며 들어온 한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한나가 “이거 또 멍하게 있네.”하며 “정신 차려라.”는 말과 함께 날린 뒤통수 치기에 눈알이 빠질 뻔 한다는 몹시 희귀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오리지널 > 해롱해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온 뒤 땅 굳는다 2  (0) 2012.04.11
비온 뒤 땅 굳는다 1.5  (0) 2012.04.11
소일거리  (0) 2012.04.11

평소처럼 늦은 점심을 먹으러 편의점으로 향한다.


자동문을 지나, 카운터에 있을 사람을 확인하는데, 해윤은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론아 뭐해?”


“소일거리야, 보다시피.”


론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거의 형태가 잡혀 완성품에 가까운 조화로, 확실히 섬세한 론이와 잘 맞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 증거로, 조화의 완성도는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중이잖아.”


“어차피 장부 정리도 시간 날 때마다 정리해두고, 매장 정리도 꼼꼼히 보고, 청소도 깨끗하게 했어. 다 하고도 남는 시간에 멍하게 있으면 너무 아깝잖아.”


“그야 그렇긴 해도…….”


해윤은 당혹스럽다는 얼굴로 다시 제 할 일에 돌입한 론이를 바라본다. 용케 어지럽히지 않고 좁은 공간에서 꼬물꼬물 거리는 모습이 귀엽긴한데 말이지.


그 시선을 느낀건지 론이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해윤이를 올려다 본다.


“점심이나 사. 사람 얼굴은 왜 봐. 뚫어질라.”


“아, 미안미안.”


멋쩍게 웃으며 도시락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자, 론은 다시 만들던 중이던 조화로 다시 시선을 떨군다.


+


-그래도, 자꾸 힐끔힐끔 보게 되는건 어쩔수 없다. 


그러고보면 론은 자신이 볼 때마다 언제나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뭔가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나 누군가랑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거나... 아니면 학교 숙제?과제라거나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을 텐데, 그는 항상 볼때마다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한가...?


매일 하고 있는 편의점 알바만 해도 그렇고. 사실 편의점 알바 하면 쉬워보이지만 생각만큼 쉬운 것도 아닐 테고... 게다가 중간중간 이렇게 조화만드는 것 같은 소일거리라거나 그 외의 뭔가 다른 알바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왠지 안쓰럽다. 정말 그렇게 맨날 일만 하고 있어야 할 만큼 돈이 급한 것일까?


사실 생긴것만 봐서는 전혀 이런일 하지 않고 자랐을법한 상류층 도련님 같이 보이는데 말이다.

여리여리 생겨서는, 사실 좀 저렇게 일만 하고 있는 것만 보면 안쓰럽다.


-돈이 필요한 거면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 나오다 목에서 막혀서 다시 돌아온다. 음... 


해윤은 적당한 도시락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그와 함께 마실 것도 아무거나 함께 집어 들면서 카운터로 갔다. 조화만들기에 집중하고 있던 론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무심하게 바코드를 찍는 론을 보고, 해윤은 말을 꺼내볼까 말까 고민했다.


'오리지널 > 해롱해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온 뒤 땅 굳는다 2  (0) 2012.04.11
비온 뒤 땅 굳는다 1.5  (0) 2012.04.11
비온 뒤 땅 굳는다 1  (0) 2012.04.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