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이 오빠~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구 가! 응? 엄마도 아빠도 다 좋다고 하셨구~”
은하가 슬슬 퇴근 시간이 다가와 분주해진 론이의 팔에 매달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론이 슬쩍슬쩍 팔을 빼며 자신의 퇴근 준비에 방해다, 라는 점을 계속 눈치 줬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은하는 맹공격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요즘 외동딸의 고집 파워! 론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 만난 것으로도 충분히 알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렇게 군다는 건 정말로 론을 자기 집으로 데러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든 거절할 수야 있지만,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론군, 웬만하면 오늘은 거절하지 말아주게나. 집사람이 은하한테 무슨 얘길 들었는지, 자네를 꼭 만나고 싶다면서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봐야 겠다고 신나하던 걸.“
―은하의 아버지가 바로 이곳의 점장이기 때문이다.
거절한다고 자를 성정의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알바가 많은 론의 사정을 고려해서 시급을 다른 곳보다 높게 쳐주는 것 때문에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다. 물론, 시급 빵빵한 이곳을 놓치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그와 불편한 일이 되도록 없는 편이 좋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이유에도 론이 쉽게 승낙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해윤이로부터, 은하가 들이닥치기 직전, 문자가 왔었기 때문이었다.
【론아 오늘 한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갈래? 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먹자^3^!】
알았다고 답장을 쓰려고 하던 차에 은하가 “앗, 오빠, 핸드폰에 한눈 팔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 봐!” 하면서 핸드폰을 빼앗아가 버린 통에 결국 저 문자의 답장은 보내지 못했다. 게다가 핸드폰을 뺐어 든 은하가 “오빠가 바람 피는지 확인해볼 거지롱~” 하면서 문자함을 열어 해윤이의 문자를 봐버린 모양이었다.
―이해윤? 한나? 뭐야? 이 이해윤이란 사람 여자지? 한나도! 같이 밥도 먹으러 가는 사이인 거야? 게다가 말투는 아무리 봐도 연상인데, 오빠 사귀는 사람 없댔잖아, 솔로랬잖아! 한 두 번 같이 다닌 게 아닌 투인데, 뭐야? 어서 사실대로 실토하세요!
운운하며 폭주해버린 은하에게 ‘이해윤도 한나도 어엿한 남자다.’라고 말할 틈도 없었고, 은하가 제풀에 지쳐 진정했을 때는 은하의 폭주에 휘말려 론도 정신없던 참이라 은하의 오해를 고쳐줘야 한다는 일은 흐지부지 되어 버렸고, 상황이 여기에 다다른 것이다!
“론이 오빠, 아까 해윤이란 사람한테 온 문자, 아직 답 안 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우리랑 같이 가자! 응? 응? 제발~”
“우리 딸 애가 이렇게 말하는데, 미안하지만 오늘만이라도 시간을 내줄 수는 없을까?”
간곡하게 부탁하는 두 사람의 합공에 론이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마음 써주신 분의 부탁이라 차마 거절하기가 어렵다. 해윤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이쪽으로―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심술쟁이야~ 난 몰라 난 몰라 내 반찬 다 뺏어먹는 거 난 몰라~
해윤이가 어제 열심히 핸드폰을 가지고 가서 꼼지락꼼지락 뭔가를 하는가 싶더니, 그 결과가 이것인 듯하다.
“오빠 벨소리 되게 특이하다……” 작게 감탄한 은하는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확 굳히며, “해윤이란 사람이잖아!! 꼭 거절해야 돼! 알았지!” 라고 대뜸 소리쳐서 점장-성호가 “으, 은하야, 너무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론군에게 너무 미안하잖니::” 하고 말리는 작은 소동도 있었다.
론은 여전히 은하와 점장님이 투닥투닥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뒤로 하고 해윤이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론아! 아까 문자 답장이 안 와서 말야. 오늘 먹으러 갈거지? 너 스테이크 되게 좋아하잖아.
“아,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 그말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문자 답 못했어.”
―그래? 한나도 내심 같이 먹으러 가는 거 기대하던 모양이던데……
“아, 한나 형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알았어…
“미안. 다음에는 같이 갈테니까, 너무 풀죽지는 마. 끊어.”
―응…….
전화를 받았을 땐 활기차던 목소리가 안 됀다는 말에 기세가 뚝 꺾인 것을 보니 엄청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나중에 만날 땐 뭔가 사과의 선물이라도 챙겨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곁에서 듣고 있던 은하가 활짝 웃는 얼굴로 론의 팔짱을 낀다.
“잘 했어! 론이 오빠 멋져~ 근데 한나란 사람 여자 아니었네? 형이라고 하는 거 보니깐…”
“어. 한나형은 키크고 잘생긴 훤칠한 미남이야. 거기에 의사였지? 아마.”
“우와, 만나보고 싶어~ 그래도 난 론이 오빠가 젤 멋지지만 말야~ 아, 그치만그치만 해윤이란 사람은 여자지? 연상의 누나일 거야! 연상인데 왠지 어려보이는 타입일 걸? 맞지맞지? 그치? 은하님의 감을 얕보지 마시라!!”
론이 은하의 말에 굳이 태클을 걸지 않는 이유는, 은하가 매우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윤이에 대해서 상당히 제대로 분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괜히 그대로 놔두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뭐, 결론은 은하를 놀리는 것이 재밌어서, 라는 것으로.
“근데 사모님이 뭘 차려주신대요?”
기왕 밥 먹을 거, 메뉴나 알고 가자. 라는 것이 현 하론의 심리 상태.
+ + +
론이가 저장된 단축 번호를 길게 누르자 통화 신호가 뜨면서 신호가 간다.
뚜-, 뚜-, 뚜-
단조로운 소리는 달칵, 하는 소리에 밀려 핸드폰은 새로운 소리를 뱉어낸다.
―여보세요.
“아, 론아! 아까 문자 답장이 안 와서 말야. 오늘 먹으러 갈거지? 너 스테이크 되게 좋아하잖아.”
―아, 미안-.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 그말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문자 답 못했어.
“그래? 한나도 내심 같이 먹으러 가는 거 기대하던 모양이던데……”
―아, 한나 형한테는 미안하다고 전해 줘.
“알았어…”
―미안. 다음에는 같이 갈테니까, 너무 풀죽지는 마. 끊어.
“응…….“
들떴던 기분은 어느새 가라앉아 바닥을 쳤다. 게다가 수화기 너머, 론이의 목소리가 아닌 잡음으로 치부될 소리들의 내용이 신경쓰였다.
―해윤이란 여자는 냅두고 나랑 먹어야 돼! 얼른 거절해버렷~ 으, 은하야 들릴라!!;;; 들리라고 하는 말인걸~ 론이 오빠는 내가 찜했는걸~ 은하야ㅠㅠ!! 아이참, 아빠는 가만 있어 봐! 딸의 연애 사업을 방해하면……
기세등등한 여자애 목소리와 그런 여자애에게 쩔쩔 매는 남자의 목소리.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부녀지간에, 여자애는 론이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고, 론이의 선약 상대일테지.
“론이가, 여자 친구도 있었던 건가…몰랐는데…….”
나름대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한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런 말도 못해줄 사람이었나 싶은 맘에서 나온 약간의 서글픔과, 수화기 너머 여자애-은하라는 여자애에게 짜증을 느꼈다.
서글픔을 그렇다 치고, 왜 짜증이 난 걸까. 그 이유를 명확히 모르겠어서 한참을 고민하던 해윤은, “밥 먹자, 이해윤~” 외치며 들어온 한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한나가 “이거 또 멍하게 있네.”하며 “정신 차려라.”는 말과 함께 날린 뒤통수 치기에 눈알이 빠질 뻔 한다는 몹시 희귀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오리지널 > 해롱해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온 뒤 땅 굳는다 2 (0) | 2012.04.11 |
---|---|
비온 뒤 땅 굳는다 1.5 (0) | 2012.04.11 |
소일거리 (0) | 201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