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튀었는데, 나는 재수가 없으려니, 튀려던 현장에서 이 망할 회장에게 잡히고 말았다. 부회장님, 어딜 그렇게 도둑처럼 살금살금 기어나가십니까? 하는 대사와, 분노가 듬뿍 함유된 미소와 함께. 아, 이마 구석에 사거리 마크도 있었어.
그렇게 잡혀와서 학생회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으니, 뺨에는 책상의 면과 닿아서 땀이 찼는지 찐득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파닥파닥, 열심히 부채질을 해보지만, 내리쬐는 햇볕에 한껏 달아오른 열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 되려 아까운 칼로리만 소비되고 있다.
“야, 망할 회장아. 에어컨 틀자, 좀.”
“닥쳐. 누구는 안 틀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짜증을 가득 담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 역시 이 더위에 지쳐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천장에 달려서 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에어컨에는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아아, 이러자고 저 녀석을 단게 아닌데! 에어컨을 향해 힘껏 눈을 야린다.
“에어컨을 믿고 선풍기를 안 사는게 아니었는데! 하나를 몰래 사서 꿍쳐뒀어야 했어!”
“좀 닥치라고! 얼른 손이나 움직여. 그리고 꿍치고 말고가 어딨어? 지금 에어컨을 못 트는게 예산 부족이라서라는 거 모르냐?”
“작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왜 예산 부족인 거냐고! 작년 선배 놈들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살더만!”
내가 투덜거리며 학생회 회의록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든 생각에 강력하게 항의하자, 윌리엄 녀석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정녕 네놈이 할 말이냐, 그게?”
“엉?”
“다 네놈 탓이잖아, 이 멍청한 놈아! 나도 모르게 네놈이 학교 행사란 행사에 쓸데없이 돈을 쳐들였잖아! 작년 선배님들은 정말 적당한 선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에어컨을 틀 여유가 있었던 거다! 네 진행에 학생들이야 좋아했지, 그게 다 학생회 예산에서 빠져나가는 걸 몰라? 지금 남은 돈으로는 올 겨울 축제 진행비도 빠듯하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구만, 너란 녀석은…!”
이런, 이 녀석도 쌓인게 많았나 보다.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축제고 뭐고 우리가 먼저 쪄죽게 생겼는데!
"아씨, 그럼 수영장이라도 가는 건 어때? 그 정도 돈이면 에어컨 트는 것보단 쌀 것 아냐? 어차피 학교 수영장은 여름에는 학생들에게 개방하고, 다른 데 가는 것보다 더 싸기도 하고. 열도 식히고! 얼마나 좋아!“
내가 열심히 역설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이 쪼잔한 앞머리 탈모남이 안 들어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지금 승기를 잡고 있는 건 나였다. 어차피 더운 건 피차일반일테고, 하루쯤 일이 밀린다고 별 지장이 있을리도 없었다. 그게 다 평소에 저 녀석이 부지런히 정리해 놓은 덕이지만. 하여튼 윌리엄이 거절할만한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더위에는 항복을 선언하며 펜이며 뭐며 잔뜩 어질러져 있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수영장 벽의 일부가 유리라, 밖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학교 건물에서 수영장을 가기 위해서는 그 유리구간 옆을 지나야 해서, 오늘의 수영장은 어떤 상태인가, 하고 살펴보니, 사람 물 물 사람 물. 휘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해, 대단해.
“우오,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징그럽게 많군.”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리며 저렇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 학교 시설이 좀 많이 좋기도 하고, 뭣보다 이 수영장은 시장과 이사장과 교장 셋이서 무슨 합의를 봐서 만든 거라서 시민들도 개방시에는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대신, 부지를 엄청 넓게 잡았다. 그러니까, 왠만한 숫자로는 북적인다는 느낌은 있어도 가득찼다 라는 느낌은 받기 힘들었고, 오늘도 많긴 하지만, 그래봤자 좀 북적인단 정도?
“회장이라는 놈이 그런 말을 하냐? 진짜 웃긴 놈이야.”
“그냥 더워 죽겠는데 사람이 바글대는 꼴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그렇지.”
“킥, 니가 그렇다는 데 뭐라고 하겠냐. 우리도 빨리 옷 갈아입고 들어가자. 더워 죽겠어.”
+
“왔노라, 수영장이여!”
벤이 탈의실에서 나와 수영장의 타일을 밟으며 기쁘게 말했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릴 정도도 아니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이게 미쳤나. 더위 먹었어? 뭐해, 쪽팔리게.”
“안 미쳤어, 더위도 안 먹었어. 난 정상이야!”
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했다. 쯧,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뭐,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지금의 생각은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얼른 물에나 들어가자고. 공기도 후덥지근하고.”
벤도 이 말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물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빙긋 웃는다. 어쭈, 그렇게 좋냐. 완전 애다, 애.
눈초리가 치켜올라가서 날카로운 인상인데도,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 벤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아마, 심심할 때 저 녀석 표정 변하는 것만 봐도 그 심심함을 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 표정이 풍부한 녀석이라, 화도 잘 냈지만 웃기도 잘 웃었다. 지금처럼.
“윌리엄, 내가 먼저 들어간다.”
아까부터 풀들을 슥슥 살펴본다 싶더니, 자기가 놀 풀장을 찍어뒀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는, 다이빙을 위한, 수심이 깊은 풀로 서슴없이 걸어간다. 짐작컨대 「사람이 없다→물이 시원하다→기분좋다→저기로 결정!」라는 사고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80%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나도 천처히 그 뒤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벤 녀석이 잠시 부산을 떨며 준비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다이빙대를 쭉 훑어보더니 거침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운동신경이 좋은 것은 알지만, 다이빙은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위험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기에, 주의라도 주려고 이름을 불렀다.
“야, 벤!”
“어? 아아, 걱정 마. 이 몸이 못할 걸 하러 올라온 줄 알아? 제대로 배웠으니까 걱정 마.”
말하는 틈에도 열심히 손과 발을 놀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녀석이 자리를 잡더니, 가볍게 발을 퉁기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물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웃는 표정으로.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그것이 부회장이라는 가볍지 않은 타이틀에도 항상 자유로웠던 녀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것에 까지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집착하는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녀석의 모습이 뇌리에 새겨졌던 그 때와 같이.
물 속에서 고개를 내민 녀석이 손을 흔든다.
“빨리 들어와. 여기 짱 시원해!”
“그래!”
그 웃는 얼굴에 이끌리고 마는 것은, 내가 벤에게 반해버렸기 때문인걸까?
나는 푸른 타일이 비치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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