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히어로 메이커 (17)


다른 녀석들은 어떻게 튀었는데, 나는 재수가 없으려니, 튀려던 현장에서 이 망할 회장에게 잡히고 말았다. 부회장님, 어딜 그렇게 도둑처럼 살금살금 기어나가십니까? 하는 대사와, 분노가 듬뿍 함유된 미소와 함께. 아, 이마 구석에 사거리 마크도 있었어.


그렇게 잡혀와서 학생회실 책상 위에 늘어져 있으니, 뺨에는 책상의 면과 닿아서 땀이 찼는지 찐득함이 느껴진다. 손바닥으로 파닥파닥, 열심히 부채질을 해보지만, 내리쬐는 햇볕에 한껏 달아오른 열기를 몰아내기에는 역부족. 되려 아까운 칼로리만 소비되고 있다.


“야, 망할 회장아. 에어컨 틀자, 좀.”


“닥쳐. 누구는 안 틀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짜증을 가득 담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 역시 이 더위에 지쳐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천장에 달려서 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에어컨에는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아아, 이러자고 저 녀석을 단게 아닌데! 에어컨을 향해 힘껏 눈을 야린다.


“에어컨을 믿고 선풍기를 안 사는게 아니었는데! 하나를 몰래 사서 꿍쳐뒀어야 했어!”


“좀 닥치라고! 얼른 손이나 움직여. 그리고 꿍치고 말고가 어딨어? 지금 에어컨을 못 트는게 예산 부족이라서라는 거 모르냐?”


“작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 왜 예산 부족인 거냐고! 작년 선배 놈들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살더만!”


내가 투덜거리며 학생회 회의록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든 생각에 강력하게 항의하자, 윌리엄 녀석이 어이없단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정녕 네놈이 할 말이냐, 그게?”


“엉?”


“다 네놈 탓이잖아, 이 멍청한 놈아! 나도 모르게 네놈이 학교 행사란 행사에 쓸데없이 돈을 쳐들였잖아! 작년 선배님들은 정말 적당한 선에서 진행했기 때문에 에어컨을 틀 여유가 있었던 거다! 네 진행에 학생들이야 좋아했지, 그게 다 학생회 예산에서 빠져나가는 걸 몰라? 지금 남은 돈으로는 올 겨울 축제 진행비도 빠듯하다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구만, 너란 녀석은…!”


이런, 이 녀석도 쌓인게 많았나 보다.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축제고 뭐고 우리가 먼저 쪄죽게 생겼는데!


"아씨, 그럼 수영장이라도 가는 건 어때? 그 정도 돈이면 에어컨 트는 것보단 쌀 것 아냐? 어차피 학교 수영장은 여름에는 학생들에게 개방하고, 다른 데 가는 것보다 더 싸기도 하고. 열도 식히고! 얼마나 좋아!“


내가 열심히 역설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이 쪼잔한 앞머리 탈모남이 안 들어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지금 승기를 잡고 있는 건 나였다. 어차피 더운 건 피차일반일테고, 하루쯤 일이 밀린다고 별 지장이 있을리도 없었다. 그게 다 평소에 저 녀석이 부지런히 정리해 놓은 덕이지만. 하여튼 윌리엄이 거절할만한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윌리엄은 더위에는 항복을 선언하며 펜이며 뭐며 잔뜩 어질러져 있는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수영장 벽의 일부가 유리라, 밖에서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학교 건물에서 수영장을 가기 위해서는 그 유리구간 옆을 지나야 해서, 오늘의 수영장은 어떤 상태인가, 하고 살펴보니, 사람 물 물 사람 물. 휘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해, 대단해.


“우오, 사람이 바글바글한데?”


“…징그럽게 많군.”


윌리엄이 미간을 찌푸리며 저렇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 학교 시설이 좀 많이 좋기도 하고, 뭣보다 이 수영장은 시장과 이사장과 교장 셋이서 무슨 합의를 봐서 만든 거라서 시민들도 개방시에는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대신, 부지를 엄청 넓게 잡았다. 그러니까, 왠만한 숫자로는 북적인다는 느낌은 있어도 가득찼다 라는 느낌은 받기 힘들었고, 오늘도 많긴 하지만, 그래봤자 좀 북적인단 정도?


“회장이라는 놈이 그런 말을 하냐? 진짜 웃긴 놈이야.”


“그냥 더워 죽겠는데 사람이 바글대는 꼴을 보니까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그렇지.”


“킥, 니가 그렇다는 데 뭐라고 하겠냐. 우리도 빨리 옷 갈아입고 들어가자. 더워 죽겠어.”


+

“왔노라, 수영장이여!”


벤이 탈의실에서 나와 수영장의 타일을 밟으며 기쁘게 말했다.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릴 정도도 아니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다.


“이게 미쳤나. 더위 먹었어? 뭐해, 쪽팔리게.”


“안 미쳤어, 더위도 안 먹었어. 난 정상이야!”


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했다. 쯧,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뭐, 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지금의 생각은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얼른 물에나 들어가자고. 공기도 후덥지근하고.”


벤도 이 말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물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빙긋 웃는다. 어쭈, 그렇게 좋냐. 완전 애다, 애.


눈초리가 치켜올라가서 날카로운 인상인데도,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 벤의 표정은 다채로웠다. 아마, 심심할 때 저 녀석 표정 변하는 것만 봐도 그 심심함을 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 표정이 풍부한 녀석이라, 화도 잘 냈지만 웃기도 잘 웃었다. 지금처럼.


“윌리엄, 내가 먼저 들어간다.”


아까부터 풀들을 슥슥 살펴본다 싶더니, 자기가 놀 풀장을 찍어뒀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는, 다이빙을 위한, 수심이 깊은 풀로 서슴없이 걸어간다. 짐작컨대 「사람이 없다→물이 시원하다→기분좋다→저기로 결정!」라는 사고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80%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나도 천처히 그 뒤를 따라서 걸어가는데, 벤 녀석이 잠시 부산을 떨며 준비운동을 하는가 싶더니 다이빙대를 쭉 훑어보더니 거침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운동신경이 좋은 것은 알지만, 다이빙은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위험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기에, 주의라도 주려고 이름을 불렀다.


“야, 벤!”


“어? 아아, 걱정 마. 이 몸이 못할 걸 하러 올라온 줄 알아? 제대로 배웠으니까 걱정 마.”


말하는 틈에도 열심히 손과 발을 놀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녀석이 자리를 잡더니, 가볍게 발을 퉁기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물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웃는 표정으로.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그것이 부회장이라는 가볍지 않은 타이틀에도 항상 자유로웠던 녀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것에 까지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제나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집착하는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녀석의 모습이 뇌리에 새겨졌던 그 때와 같이.


물 속에서 고개를 내민 녀석이 손을 흔든다.


“빨리 들어와. 여기 짱 시원해!”


“그래!”


그 웃는 얼굴에 이끌리고 마는 것은, 내가 벤에게 반해버렸기 때문인걸까?


나는 푸른 타일이 비치는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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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풀네임이 너무 길길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왕네


아마도 남라나벤을 쓰고싶었던 것 같다: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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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두 사람은 동거 중이라는 설정.

...사실은 집주인과 하숙생의 관계 정도일겁니다.



"벤님, 일어나요. 벌써 아침인데."

"……난 야행성이야."


로엔이 다시 한 번 흔들자, 일어나기 싫다는 무언의 시위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실거에요!?"

"…그러니까 야행성이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잠에 잠겨 사그라들었다.

로엔이 이불을 잡아당겨 보아도, 버티는 벤의 악력에는 이길 수가 없어서, 일단 힘으로 이불을 벗겨내는 것은 포기했다.

그 후, 로엔은 직업이 직업인만큼,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마법사 특유의 고성능 뇌세포는, 그 진가를 발휘하며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그 방법들 중에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자신의 패로 고른 로엔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작게 쉼호흡 한 번 하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벤의 귓가에 훅, 하고 바람을 불어넣고 떨어졌다.

벤이 흠칫, 하고 떨자, 로엔은 '아, 깼다.' 하는 생각에 기쁜 맘으로 오늘 아침 메뉴를 불러주며 이불 밖으로 꼬셔내려고 다시 귓가로 다가가려는데 벤이 몸을 크게 돌려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벤도, 로엔도, 서로 민망해서 후다닥 이불 밖으로 나와 각자 벽을 바라보며 등을 마주댔다.

한참을 조용히 벽을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엔이었다.


"─일어나셨으니, 아침밥 드세요. 오늘은 벤님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뒀는데……."

"-알았어. 세수 좀 하고 갈테니까."

"그럼 기다릴게요!"


로엔이 벤의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방을 뛰쳐나갔다.

문턱을 지나 식탁 앞에 도착한 로엔은 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따끈따끈한 온도에, 얼굴에 피가 몰린 듯한 느낌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짚었던 손을 살짝 내려,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그 짦은 순간,

닿았던 부드러운 감촉은,

마치 마시멜로같아서.


"…좋은 느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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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엔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기쁨의 웃음. 정말로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린다. 그 목소리조차 흥에 겨워 잔잔하게 느껴지는 기쁜 마음.


 


  "언제나 아름다워요. 알아요? 당신이 믿어준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런 마음씨라니, 그런 사람이 저를 본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눈앞에는 당신의 얼굴이 떠오르고, 귓가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맴돌아."

 

  로엔은 연극을 하듯 제자리에서 빙글 돌곤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들어올려보였다.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웃음과, 약간의 슬픔이 묻어났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 사람이야. 멈춰있는 사람이 아닌걸. 하지만 그럼 저를 떠나버릴테니까. 그건 너무 슬프다구요. 저에겐, 당신이 이렇게나 필요한데, 당신이 떠나버린다니."

 

  로엔은 몸을 숙였다. 작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손을 뻗었다. 바라보는 로엔의 눈동자는 상냥하게 웃고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광기마저 묻어났다.

 

  "그러니까 벤님의 팔과 다리같은건 부러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럼 저에게서 떠나갈 수 없을테죠. 벤님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싫으니까, 치료를 하더라도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거에요. 언제나 제 곁에 두고, 벤님의 상냥한 목소리도 벤님의 달콤한 체취도…, 당신의 모든 것은 제 것이에요. 오로지. 저만의 것."

 

  로엔이 손을 뻗은 곳엔 벤의 팔. 로엔이 손이 팔과 다리를 쓸고 지나갔다.

 

  벤의 온 몸에 봉인의 주문이 가득했다. 벤의 몸엔 힘이라곤 남아있지 않아 뒤로 돌려져 묶인 팔조차 풀어낼 수 없었다. 다리 역시 쇠구슬에 이어진 쇠사슬로 포박당해 있었다.

 

  로엔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얼굴을 쓸자, 벤이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재갈이 물려져 있어 "우으……." 하는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로엔이 검지로 턱을 잡아올려 눈을 마주쳤다. 벤의 눈동자는 의문을 담고 있었다.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로브 자락으로 닦아내는 로엔의 얼굴은 잠시 보였던 광기도 잠잠해 온화한 얼굴이었다.

 

  "울지 말아요. 당신의 눈물을 땅에게, 공기에게 조차 빼앗기고 싶지 않아. 보이고 싶지 않아. 볼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이에요, 벤님."

 

  로엔이 손수건을 꺼내 벤의 눈을 가렸다. 손수건을 정성스럽게 묶은 로엔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벤을 턱을 잡아 올려, 입을 맞추었다.

 

  ─아아, 사로잡힌 쪽은 과연 어느쪽일까요?

 

  로엔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사랑해요. 나만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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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들 치정싸움에 자꾸 마왕님을 얽혀 넣는 것은 다 저의 농간탓이에요ㅋㅋㅋㅋㅋㅋㅋ이런 미천한 인간이 마왕님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위지만 넘 재미따ㅋㅋㅋㅋㅋㅋㅋㅋ악ㅋㅋㅋ



    "벤…님.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난 괜찮으니 어서 이 녀석을 데리고 피해라."


    금발이 살짝 흔들린다. 소년은 공주를 받아 안았다. 청년은 소년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가야하죠? 항상 가장 다치는 것도 당신이었어. 그런데 또 당신만, 당신만 사지死地로 가야하는 거죠? 어째서냐구요!"


 

    로엔이 외친다. 적이 들을 수도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인정하지를 않아. 격해진 감정을 담아서. 벤의 얼굴을 응시했다. 벤의 얼굴은 진지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아무 말 안 하고 그저 믿어 줄 수 없는 것은, ─적이 마왕이기 때문에.

 

    "괜찮아. 게다가, 마법사인 네가 이렇게 흥분하면 안 된다. 막둥이 너는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해. 나의 속도를 따를 이는 없어. 그렇다면 치고 빠질 때에도 가장 유리한 것은 나다. 그건 네가 제일 잘 알거야. 그러니까, 그 녀석을 데리고 도망쳐. 알았지?"

    "…벤님…!"

    "날 실망시키지 마라, 로엔. 언제까지 바보처럼 굴테냐."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하고 있는 벤이었지만, 일단 최우선 순위는 공주와 최연소자인 로엔을 무사히 대피시키는 것. 벤은 애써 냉정하게 말했다. 로엔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슬픈 눈동자가 흔들리는 채로, 로엔이 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벤은 이미 문을 닫기 위해 문 밖에 있었다.

 

    "…벤님!"

 

    벤은 웃었다.

    돌문이 '그그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시 볼 수 있길 빌어다오."

 

    로엔은 자신이 발동시킨 '텔레포트'의 마나가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문이 닫힐 때까지 벤을 바라보았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닫힌 문과, 건너편에서 빛과 함께 사라지던 일행과, 남은 자신과, 다가오는 적. 벤은 의연한 얼굴로 그 돌문에 단검으로 뭔가를 세기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돌이 깍이는 소리가 멈추었다. 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새겼는지 전투를 대비하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너 혼자인가? 믿을 수 없군. 어째서 혼자 남은거지?

 

 

    벤은, 웃었다. 그리고 외쳤다.

    "난 내가 지킬 것을 못지키는게 죽는 것보다 싫거든!"

 


 


 


 


 


  몇 합을 겨루었던가. 마왕의 공격은 매섭기 그지 없었다.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괜히 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강했다. 그의 순수한 마기는 그 자체로도 손색 없는 훌륭한 무기로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마기로 오염시켰다. 게다가 그는 그런 마기를 검의 형태로 쓰고 있었는데, 그 예기 또한 대단했다. 대륙의 어느 명검을 가져다 비교해보아도 더 훌륭하면 훌륭했지, 못하지는 않을 명검 중의 명검이었다.

  게다가 마왕의 검술을 뛰어나, 그의 맹공세에 벤은 만신창이의 몸으로 벽에 처박혔다.

 

  "…으윽……, 크흐……."

 

  죽은 피를 게워낸 벤이 목에 피가 엉겨붙어 숨쉬기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곤 힘들게 숨을 쉬었다.

 

  -괴로운가.

  "이, 쿨럭…, 미친 새끼야, 너 같으면, 크… 잘도 안 아프겠다……."

 

  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벽에서 미끌어져 떨어진채로 겨우사리 입만을 열었다. 단검 두 자루를 빼면 별다른 무기도 소지하지 않는 습관 덕에─속도 유지를 위해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이제 벤에게 남은 무기라곤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다. 그나마도 방금의 격돌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늑골은 가볍게 서너 대는 나간 것 같은데 슬슬 열이 올라오는 것 같다. 마왕의 공격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왼팔은 깔끔하게 동강났다. 내 몸에 당한 기술이지만 대단하단 말이 절로 나오는 깔끔한 공격이다.

 

  게다가 이것이 봉인된 능력이라면, 마왕은 과연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지금은 변변한 육체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벤은 새삼스레 이 마왕을 봉인했다는 용사에게 존경심이 가득담긴 눈빛을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쿨럭…!"

 

  속에서 치솟는 핏덩이를 게워냈다. 목구멍을 타고 혈향이 올라온다. 이미 상당한 피를 흘려버려 눈앞이 어지럽다.

  마왕이란 작자는 공격도 멈춘채 이 쪽을 주시하고 있다.

  벤은 통증과 함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습게 보는거냐."

  -그렇게 느껴지는가.

  "크……쿨럭…, 그럼… 뭐라고, 하지…? 쓰러트릴거면…, 어서 와라. 난 더, 싸울 수 있다고……."

 

  벤이 입가로 흘러내린 피를 소매로 훔쳐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웠지만 눈빛만큼은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힘이 안 들어가는 손에 애써 힘을 주었다. 과연 이 상태로 때린다고 해서 상대에게─그것도 최강의 실력을 가진 자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대로 쓰러져서 당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는다.

 

  "자, 덤벼."

  -좋다, 인간. 그렇다면!

 

  호쾌하게 외친 마왕과 벤이 또다시 격돌했다.

 


 


 


 



  벽부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벽에는 처참할 정도로 피가 난자해 있었다. 피는 뭔가에 쓸린듯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는데, 그 아래는 벤이 피투성이인채로 늘어져 있었다.

 

  온 몸의 뼈는 부러졌고, 피는 이미 치사량 이상으로 흘린 것 같다. 이미 고통따위를 느낄 수 없게 된지 오래다. 신경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 같다.

 

  힘 한 줌 없이 늘어져 있었다.

 

  죽기 전에 주마등이 스쳐지난다고 하던가.

  벤의 눈 앞으로 파노라마처럼, 모든 일들이 스쳐간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단란했던 가족. 납치. 암살자로서의 혹독한 훈련들. 사부와의 만남. 카슬러의 성을 물려받은 일. 배신을 당해 성에 잡혀가 연극의 일행이 된 일. 공주에게 호의를 품게 된 일. 어느 순간부턴가 모험을 즐겁다고 여기게 된 자신. 그리고, 공주를 위해, 모두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자신.

 

  "…죽는…건가……."

  -살고 싶나?

  "이……크……."

 

  뭔가 말하려는듯 발끈했지만 갑자기 몰려드는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 벤을 보던 마왕이 손─이라기보단 그저 마기의 덩어리 쪽에 가깝겠지만─을 뻗더니 이마를 쿡 찔렀다. 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공중에 부유하는 느낌을 받으며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던 차에 목소리, 아니 울림이 느껴졌다.

 

  -내 말이 들리나.

  -이건 또 뭐지. 이제 죽을 놈한테 말을 거는 의도를 모르겠군.

  -말은 정말 잘 하는군?

  -이 몸은 이래뵈도 말빨로 져본 적이 없다.

  -호오, 그런가? 그런 의미에서 내 부하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마왕이 물었다. 벤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진지하게 이 놈이 마왕이 아니라 그냥 싸이코가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미쳤냐? 죽기살기로 싸워서-아니 이건 내 쪽 한정이지만, 사람을 다 죽여놓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거지?

  -아아, 말 그대로다. 스카웃 제의라고 해두지.

  -기각. 그냥 난 죽으련다.

 

  잠시 침묵하던 마왕이 한 마디 흘렸다.

 

  -그들이 도망갔다고 안심하고 있는 건가?

  -!!!!

 

  벤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혼부터 흔들리는 충격. 벤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마왕이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부하가 된다고 한다면, 인간계 침공 때 세날 왕국만은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마왕의 말인데 믿으란 건가.

 

   벤은 끝까지 의심했다. 영혼의 축부터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계산해보고 의심한다. 신중한 모습.

  마왕은 실소했다.

 

  -이래뵈도 왕이다. 아무리 마족이라 한들 약속이라는 것은 있는 법이지. 굳이 따지자면, 인간들의 약속과는 다르겠지만, 피의 맹세에 가깝다고 해둘까? 그 정도의 신의도 없다면 부하를 거느릴 수 없겠지않나.

  -…….

  -자, 어때?

 

  벤은, 눈을 감았다. 정확히는, 영혼의 상태니, 시각을 닫았다고 해야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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