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하하, 뭐야 왕. 이건 너무 약하잖아?"




새하얗고 기울어진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이치고의 내면세계에 시로사키의 목소리만이 공기를 울리며 퍼져나갔다. 질척하고 끈적하게, 흘러내릴듯한 살기와 약간의 허무, 그리고 비웃음. 




























[블리치/시로쿠로] 붕괴하다






























분명히 어떻게 들어도 그것은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은 어떤 감정을 가리고있을뿐, 웃음속에서 배어나오는 느낌 혹은 분위기같은 것은 절대로 웃음도 아니었으며 비웃음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공기를 울리는 시로사키의 광소狂笑와 함께, 내면세계의 건물 하나가 부스러져갔다. 그 건물은 이 세계의 주인, 이 세계의 왕인 쿠로사키 이치고라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자 가장 괴로운 추억인 어머니와의 추억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치고는 결코 약한 존재는 아니다. 단지 자신을 너무 내모는 경향이 있고, '나'보다는 다른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존재이지만 약하지는 않다. 비가 자주 내렸지만, 그 비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나 이치고는 견뎌냈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하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섰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내면세계의 건물이 무너진적은 없었다. 오히려, 주변사람들과의 돈독한 관계에 비례해 건물이 생겨나고 자라났으면 자라났지 건물이 무너진적은 없었던 일이건만, 건물이 그것도 가장 소중하게(또는 가장 괴롭게)여기며 결코 잊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던 기억이 붕괴했다.




내면세계에서 건물의 붕괴는 기억의 소멸과 직결하는것. 그런고로 절대 잊지 않았을 기억의 소멸은 이치고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는것을 암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치고 정도로 이런일 저런일 다 겪어 정신적으로도 크게 성장한 사람에게는 왠만한 쇄뇌도 통하지 않고, 왠만한 충격도 스스로 견뎌낼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치고는 생각보다 자기보호본능이 강한 편이다.




이사람 저사람 챙겨주고 다니고, 주변에 사람들과 분위기가 좋아져서 이제는 티가 거의 안나지만, 특이한 머리색때문에 괴로웠던 기억들과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보이는 특이한 체질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마음을 걸어잠구고 있었다.




이때 이치고가 마음을 허락했던 사람은 매우 극소수로 가족들정도. 물론 타츠키와도 어느정도 친하게 지내긴했지만, 그것조차도 아주 약간 허락했을뿐, 마음 깊이까지 허락한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머물러 있지만, 이치고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 어떤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자신이 받을수있는 상처를 최소로 줄이기위한 자기보호본능의 배리어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치고가 진실로 믿는 사람, 마음속 깊은곳까지 허락한 사람은 오직 가족들뿐이다. 루키아나 우라하라, 그외의 친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한겹 이상의 껍질을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인도, 그들도 이치고가 자신들에게도 경계심을 알게 모르게 남겨두고 있었다는 것은 모르고 있을것이다. 이성 이전에 콤플렉스에 의한 자기붕괴를 막기위해 본능에서부터 우러러나와 그 언제까지라도 절대적인 방어벽을 철거하지 않을것이다. 자기 스스로 의식하고 없애지 못하는 한은 영원히, 이치고가 죽을때까지 사라지지 않을테니까.




그런 이치고가 이정도로 붕괴할 정도라면, '누군가'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자기자신' 스스로부터 시작된 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치고가 스스로를 붕괴시킬만한 일이 분명히 정해져있다는것이 문제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치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이치고를 아끼기때문에 이치고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배려, 도움, 그리고 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왠만한 일가지고는 정신적 충격을 주기가 힘들다.




주변사람들의 이치고를 아끼는 마음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지만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죽어서는 않돼'라며 자신을 쇄뇌시켜,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을 미연에 막아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헌데 이것이 풀렸다는 말은 다시말해 그나마 이치고와 가까웠던 이들이 배신을 했거나, 눈앞에서 자신때문에 죽었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죽었을때정도 일것이다.




물론 극악의 상황이라면, 어렸을적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본능 깊숙히 잠식해들었던 콤플렉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자극을 받은 것일수가 있다. 다른 것들은 외부에 의한 것이기에 그나마 회생의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남아있겠지만, 이것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돌이킬수 없다. 스스로부터 원해 붕괴해가는 것이므로, 누군가가 막을 수 있고 돌이킬수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다. 이치고가 자신을 포기한 것이니, 스스로부터 자신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100%의 확률로 이치고는 망가지고 내면세계는 붕괴하고 만다.




그렇게되면 이치고의 몸을, 이치고의 능력을, 왕의 모든것을 기마인 내가 가지게 된다. 주인이 없는 기마는 자유로운 기마이기 때문에. 내가 그토록이나 바래왔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한건 이런것이 아니야.'




분명 나는 '자유'를 갈구했지만, 그것은 결과일뿐 내가 원한 방법은, 수단은 이런것이 아니었다. 기마로서 반란을 일으켜 왕 스스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나의 강함을 인정받음으로써 얻을 '자유'를 원했고, 정복했기에 얻을 수 있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원했다. 그리고 정복당했기에 패자의 모양을 한 왕을 보고싶었을 뿐인데. 그 모습을 실컷 비웃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당신은, 이렇게도 약한 왕이라고. 그런 주제에 감히 누군가를 지킬 수 있겠느냐고. 자신의 힘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더 강해지겠다는 바보같은 생각따윌 왜 하느냐고.




그런데 이 바보같은 왕은, 이 약해빠진 왕은 스스로 왕의 자리를 포기해버렸다. 내가 끌어내리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패자의 모샹을 만들지도 못했는데, 나의 힘으로 왕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어야 하는데, 약하지도 않던 녀석이 스스로 붕괴하는 꼴 따윈 보고싶이 않았는데…!




또 건물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는 가족들과의 추억들이 붕괴한다.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한개씩 사라져간다.




어리석은 왕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스스로 망가져버리는 나약한 왕이 저주스러웠다. 약한 왕조차도  나의 힘으로 끌어내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내가 이리도 무력했던가. 가장 강하게 되었을때 끌어내리려고 했건만 이 약한 왕은 어째서 망그라져 버리는 것인가. 자신의 힘을 모두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더더욱 강해질수 있건만 강해지지도 못하고.




나의 진득한 분노는 내면공간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분노하는 가운데서도 가슴 한 구석이 텅 빈듯한 허무함, 허탈감도 엄습했다. 분명, 화가 나는데 웃음밖에 나오질 않는다. 메마를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웃음소리는 진득한 슬픔이 배여있었다. 화가났는데도 왜인지 모를 슬픔이 밀려온다.




건물이 또 다시 부스러져 날린다. 점점 붕괴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무너지고, 부스러지며, 뭉그러지고, 흩날리고, 사라지고, 녹아내리는 건물들.




이윽고 단 한개의 건물만이 남았다.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핏빛 건물이었다. 이 공간에서 살아왔던 시로사키와 참월조차도 처음 보는 그런 건물. 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건물이었다.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단 한개의 건물은 이치고의 어머니가 자신때문에 죽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와 죽게 만든 자신은 살아있다는 것에 치미는 죄악감, 그리고 후회와 슬픔.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어우어져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핏빛건물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입구가 있었다. 시로사키는 그 건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들어가야만 할것같은 기분에 이끌려 작은 문을 열었다.




건물의 안은 의외로 하얀색이었다. 너무나 깨끗해서 이곳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미쳐버릴 정도로 흰.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치고가 있었다. 그것도 작은 아이의 모습을 한 이치고가. 아이의 모습을 한 이치고는 울고있었다. 하지만 깨끗한 공간과는 다르게 이치고의 모습은 새까만 안개에 둘러쌓여있었다. 안개는 부정적인 감정들의 표출이었다.




이치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을 분리해놓았고, 그로 인해 남은 찌꺼기들을 딛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하지만 분리된 감정은 그 누구의 위로도 관심도 닿지 못하고 점점 검게 검게 물들어가고있었다. 지금도 검은 안개는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치고의 주위를 덮을 정도였던 안개는 꿈틀거리며 공간을 채워갔다.




시로사키는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왕은 혼자서 이렇게도 괴로워하고 있었던거다.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짊어지고,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한채로. 심지어는 그 영혼에서 태어난 자신에게 조차도 그 짐의 존재를 가리지 않았던가. 물론 본인도 의식하지는 못했을거다. 단순히 지켜야한다는 감정으로 조금씩 그 존재를 내비치고 있었을 뿐이니까. 또 다른 이치고인 나조차도 깨닫지 못 할 정도로 매우 조금씩만. 




그렇다고 동정심이나 분노나 그런 감정이 치밀진 않았다. 그건 생각보다 의외였지만, 무너져내린 이유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혼자서 버텨내기에는 너무 지쳐버린거야.'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줄곧 비를 맞으며 지쳐갔던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분명, 나도 그렇게 지쳐가던때가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이치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이해를 했을 뿐이지 인정한것은 아니다.




"이 바보같은 왕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짊어지려고 한거냐."




검은 안개가 뭉클하고 시로사키의 발을 집어삼켰다. 이치고의 괴로움이 흘러들어왔다.




"이렇게 괴로웠는데도 웃었던건가. 어째서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지?"




검은 안개가 시로사키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치고의 생각들이 묻어나왔다.




"주변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은데도, 그렇게 벼랑끝에 몰려도 끝까지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는 그 심보는 또 뭐냐."




검은 안개가 시로사키를 집어삼켰다. 이윽고 하얗던 공간이 새까맣게 변했을때 시로사키는 안개를 뚫고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한걸음, 두걸음. 이치고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안개는 짙어졌다. 안개가 시로사키를 잡아먹으려는 듯 사납게 달려들었지만 참월을 휘둘러 물렸다. 마침내 이치고의 모습이 보였다. 시로사키는 필사적으로 다가가 안았다. 작은 몸을 꼬옥하고 안아주었다. 




"왕이시여, 이제 혼자가 아니니 너무 괴로워 하지는 마.."




검은 안개가 모든것을 집어삼켰다. 내면세계는 점점 작아졌고, 두사람만이 안개속에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세계와 함께 소멸했다.




"바보같은 딸기같으니──"




시로사키의 말이 울렸다. 그리고 공간의 소멸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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